달러당 120엔대로 곤두박질친 엔화 가치가 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상황에서 일본은행만 나 홀로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한 영향이다. 오랫동안 디플레이션을 겪어온 일본은 경기 진작을 위해 양적완화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부양 효과 없이 엔화 가치만 추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일본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0일 엔달러 환율은 122.975엔을 기록했다. 전날에는 124엔을 웃돌며 2015년 8월 이후 6년 7개월여 만에 최저치로 밀렸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도 엔화는 100엔 당 993원39전을 기록하며 1000원을 하회했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서 엔화의 값이 떨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고 긴축에 돌입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달리 일본은행은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고수한다. 일본은행은 최근 연 -0.1%인 정책금리를 동결했다. 장기금리를 낮게 묶어두기 위해 정해진 금리에 국채를 사들이는 ‘공개시장 조작’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더 많은 이자를 주는 해외 시장으로 투자금이 빠져나가면서 엔화 매도세가 강해지는 것이다.
일본이 홀로 양적완화를 유지하는 건 오랜 디플레이션 경험 때문이다. 일본의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겨우 0.9%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7.9% 올랐다. 일본으로서는 인플레이션보다 저물가와 경기침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는 7월 일본의 참의원 선거가 예정돼있다는 점도 저금리를 통한 경기부양책을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악화는 엔화의 매도세를 키우고 있다. 지난 1월 일본의 경상수지는 1조1900억엔 적자를 기록하며 8년 만에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현지 언론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자잿값 상승이 일본 기업의 수익성을 압박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모두 엔화가 안전자산이라는 믿음을 흔들어 자본 유출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외환시장에서는 엔화의 약세 흐름이 2분기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 차별화가 지속되면 엔화 약세 압력이 계속될 것”이라며 “과거 엔화의 약세 폭 평균을 고려하면 올해 엔달러 환율은 135∼140엔까지 추가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엔저 현상을 용인하던 일본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날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와 면담을 진행했다. 회담에서는 최근의 급속한 엔저 및 채권금리 상승에 대한 대응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구로다 총재는 하지만 회담 이후 “(금융완화) 정책 기조가 환율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완화적 통화정책이 한동안 계속될 수 있다는 뜻이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