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우크라 구호편지, 1m80cm짜리 구호약품 영수증

입력 2022-04-02 00:05

헝가리 데브라첸 기차역에서 또 다른 동역자를 만나게 됐다. 조영연 우크라이나 선교사가 폴타바 지역에서 사역할 때 예배당 부지 매입부터 교회 행정까지 살뜰하게 도와왔던 발레리야(25) 청년과 남동생 지마(15)였다. 우크라이나에 성도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것이 늘 마음 아팠던 조 선교사는 두 사람을 꼭 껴안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사진).

발레리야의 집은 키이우(키예프) 인근에 있는 브로바리(Brovary)다. 전쟁이 일어난 후 집에 머물다가 지난달 27일 집 근처 군부대에 6대의 미사일이 떨어졌고 뒷산에 러시아 군인들이 목격되면서 피란을 떠났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서쪽인 무카체보까지 이동해 피란민들을 돕는 봉사단체의 무료급식으로 버티다 헝가리 국경으로 넘어왔다. 우리 긴급구호팀이 우크라이나 동부 쪽으로 구호품을 보내는 데도 발레리야의 역할이 크다. 앞으로 무카체보에 머물면서 폴타바에서 오는 트럭과 교회 사역자를 만나 이곳에서 보내는 구호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폴타바를 출발한 15톤 트럭이 무카체보 근처에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요한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국경을 통과하면 우크라이나 청년들이 구호품을 내려서 폴타바로 출발할 트럭에 옮겨 실을 계획이다. 오늘 오전엔 의약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했다.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보내 준 필요 약품 리스트에는 해열제 감기약 진통제 혈압약 등의 품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숙소로 들어와 구입한 약품 영수증을 펴 봤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폴타바 인근 8개 마을 200여 가정에게 지금 꼭 있어야 할 약품을 세밀하게 주문하다보니 영수증 하나가 성인 남성의 키보다 더 길었다. 구호품들이 준비해 놓은 창고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하루 빨리 이 물품들이 전쟁의 한 가운데서 신음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소망도 커졌다.

예정대로라면 24일 오전 9시에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준비해주던 헝가리개혁교회 ‘사랑의봉사단’에서 트럭 운전사를 구하지 못해 오늘 못 갈 것 같다는 연락을 하루 전날 밤에 받았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로 넘어가려고 하는 운전사가 없어 생긴 문제였다.

한국에서 출발 전부터 헝가리에서 이 일을 섬기는 정도 선교사에게 계속 강조하며 부탁했던 것 중 하나가 ‘트럭’이었다. 긴급구호 때 구호품을 구입하는 것과 이를 수송할 트럭을 확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 선교사도 사랑의봉사단과 소통하는 동안 문제 없이 진행되던 부분이었다가 바로 전날 늦은 시간 소식을 접해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전쟁터에 보낼 구호품을 힘겹게 시간에 맞춰 준비해뒀는데 정작 출발하기로 한 전날 구호품을 싣고 가야 할 트럭이 사라진 것이다. 마음을 부여잡고 팀원들과 둘러앉아 기도하고 믿음으로 고백했다. “우리의 계획은 내일 구호품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4회에서 계속.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