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정부에서 해외자원 개발 실무를 담당했던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장이 2018년 출처 불명의 산업부 문건을 접한 뒤 심리적 압박을 받아 사의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해당 공공기관은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 대상인 8곳 중 한 곳이다.
해당 문건은 MB정부가 추진한 한국석유공사의 해외 유전 인수 등이 청와대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산업부 측은 이 문건 출처가 산업부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작성 사실은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 출신으로 현 정부 들어 산업부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일했던 A씨는 30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4년 전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가 언론 취재와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퇴 전 ‘석유공사의 해외 유전 인수는 청와대의 부당한 개입·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취지의 산업부 문건에 대한 언론 취재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A씨는 직접 산업부에 문건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는데, 당시 산업부 관계자는 “산업부 컴퓨터에서 문건이 나오긴 했는데, 누가 작성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문건을 만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A씨는 산업부 고위층으로부터 직접 사표 제출을 종용 받은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출처 불명의 문건을 전달받은 데다, MB정부 해외 자원개발 사업 부실 의혹에 대한 산업부의 검찰 수사 의뢰까지 더해지자 압박으로 느껴져 임기가 남았음에도 사표를 냈다고 했다.
이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은 2019년 1월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검찰에 고발했고, 같은 해 A씨는 서울동부지검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자신의 사퇴 정황 등을 진술했다.
검찰은 고발장 접수 후 3년이 지나 해당 의혹에 대한 수사를 재개한 상태다. 최근 검찰은 산업부에 이어 산하 발전 공기업 4곳과 공공기관 4곳을 압수수색했다. 이곳의 기관장들은 모두 임기를 남긴 상태에서 사퇴했는데, 당시 산업부 국장으로부터 사표 제출을 강요받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A씨가 접한 문건 작성자와 전달 경위도 산업부 블랙리스트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규명될 수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사퇴 과정에서 윗선 개입이 증명되고, 이러한 방법으로 일괄 사표를 받은 정황이 파악된다면 직권남용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내려진 대법원의 환경부 관련 판례에 비춰 봐도 윗선 개입을 밝혀낼 물증 확보가 수사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법원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장관의 사표 제출 지시를 인정한 주요 근거는 ‘산하기관 임원 교체계획’ 등 문건이었다. 여기에 환경부 실무자들의 진술이 혐의를 뒷받침했다. “일괄 사표 징구 계획을 수립했고 장관이 동의했다”거나 “(장관으로부터) 재신임 의향을 물어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실질적 의미는 사표 제출을 받으라는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사표 제출 요구와 사직 사이의 인과관계 입증도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 사건에서는 “사표 제출 요구가 없었다면 임기 종료일까지 근무했을 것”이라는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인과관계가 인정됐다. 이른바 ‘물갈이’만을 목적으로 한 사직 압박이 직권남용에 해당하는지는 해당 판례로 법리가 정리된 상태다. 법원은 공공기관 운영법이나 정관에 규정된 사유가 없음에도 사표 제출을 요구하는 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조민아 임주언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