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군 성폭행 사건 피해자 첫 증언 “남편 쏴 죽이고 차례로 성폭행”

입력 2022-03-29 23:04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 이르핀에서 28일 한 여성이 아이를 안고 피란길을 재촉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브로바리 지역 셰첸코브의 작은 마을에 살았던 나탈리아(33·가명)는 지난 9일 끔찍한 일을 겪었다. 남편이 러시아군에 살해됐고, 본인은 성폭행을 당했다. 나탈리아는 “러시아군이 내 머리에 총을 들이대면서 ‘당신 남편이 나치이기 때문에 총으로 쐈다’고 했다. 그리고는 옷을 벗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28일(현지시간) 최근 우크라이나 검찰청이 수사를 개시한 ‘러시아군 성폭행 사건’ 첫 사례인 나탈리아의 얘기를 전했다. 러시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우크라이나 피해자가 언론과 인터뷰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탈리아는 “러시아 측이 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고 러시아 병사들은 성폭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식으로 부인하는 걸 보고 인터뷰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탈리아와 그의 남편, 4살 아들은 평화로운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부부가 직접 나무와 돌로 지은 작은 집도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집이었다. 다음 달 24일은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러시아군이 이 마을까지 밀고 들어온 뒤 나탈리아 가족의 행복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그때의 일을 작은 목소리로 털어놨다. 옆에 잠든 아들이 들을까 그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망을 아직 알지 못한다.

지난 8일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장악하기 위해 브로바리로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 침공 소식을 들은 나탈리아 부부는 ‘여기엔 민간인 가족이 있을 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란 의미로 집 문에 하얀 천을 걸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나탈리아 부부는 집 밖에서 한 발의 총성과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두 손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가보니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반려견이 보였다. 총을 겨누고 있는 러시아군도 눈에 들어왔다.

나탈리아는 러시아군이 처음에는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한 병사는 “여기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며 “위협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려견을 죽인 병사는 총을 쏜 것을 사과하며 자신도 고향에서 아내와 함께 개를 길렀다고 말했다.

자신을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로마노프라고 밝힌 군인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과 나는 연애를 하게 될 것”이라며 나탈리아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일부 병사들은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고 나탈리아는 말했다.

상황이 갑자기 급박하게 바뀐 건 한 병사가 남편 차 안에 있는 군복을 발견한 뒤였다. 러시아군은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차에 총을 쏘며 윽박질렀다. 그리곤 남편을 ‘나치’라 욕하며 데리고 나가 총으로 쏴 살해했다.

경악하는 나탈리아를 향해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데리고 와서 집 곳곳에 버려진 엄마의 뇌수를 보여주겠다”고 협박했다.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후 러시아군은 나탈리아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차례대로 돌아가며 성폭행을 저질렀다. 범행 내내 나탈리아 머리에 총구를 겨눈 채였다. 그동안 아들은 어두운 보일러실에 들어가 울고 있었다.

나탈리아는 술 취한 러시아군이 잠들자 아들을 데리고 몰래 탈출해 이웃집으로 피신했다. 이후 자신의 친정 부모의 집으로 옮긴 뒤 다른 지역으로 대피했다.

나탈리아는 “남편 시신을 수습하러 돌아갈 수도, 그를 묻어줄 수도 없다”며 “아직 러시아군이 그 마을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피해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택할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일이 실제 일어났다는 걸 믿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그는 “아들이 아직 아버지가 숨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빠에게 줄 빵도 같이 사자’고 한다”고 흐느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군이 조직적으로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해 반드시 가해자들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