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우크라 문화유산 파괴…‘역사지우기’ 나섰나

입력 2022-03-30 00:07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서 28일(현지시간) 자원봉사자들이 예수의 열두제자 가운데 한 명인 안드레아 사도상 주변에 방호용 모래주머니를 쌓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하는 과정에서 수십 곳의 문화유산을 파괴하거나 훼손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신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체성 지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을 쏟아냈다.

2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미국 NBC뉴스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개전 이후 문화유산, 박물관 등 최소 39곳의 우크라이나 주요 역사·문화 시설을 파괴·약탈했다.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히르키우의 미술관 미즈기나 발렌티나 관장은 “러시아군이 쏜 포탄이 예술작품 2만5000여점이 있는 미술관 주변에 떨어졌다. 이 여파로 건물이 흔들리고 유리창이 모두 깨져 직원들이 작품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 했다”고 말했다.

미술관과 달리 17세기 유산인 히르키우의 홀리 도미션 성당은 포탄을 정통으로 맞았다. 안에 대피해 있던 민간인들은 다치지 않았으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이 깨지고 일부 장식물이 파손됐다.

러시아군이 완전히 포위한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아르히프 쿠인지 미술관도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우폴 시의회는 최근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유명 예술가들 작품 2000여점이 전시된 아르히프 쿠인지 미술관을 파괴했다”고 전했다. 전시된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도 26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러시아가 드로비츠키 야르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파괴했다. 정확히 80년 만에 나치가 돌아왔다”고 성토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1만5000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러시아군을 나치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 빗댄 것이다.

28일(현지시간) 러시아군 포격으로 파괴되면서 불이 난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의 5층짜리 건물 주변에서 소방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의 문화유산 파괴가 국제법상 전쟁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1954년 체결된 헤이그협약은 역사적 기념물과 문화유산을 목표로 공격하는 행위를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우크라이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문화재 7곳이 있다.

이리나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문화부 전 차관은 “러시아가 주택과 병원, 학교는 물론 문화유산까지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다”며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즉 우리의 유산과 역사, 정체성, 독립국으로서의 우크라이나를 지도에서 아예 지워버리려 한다”고 성토했다.

외신들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문화유산을 파괴한 것을 고의적인 ‘역사 지우기’라고 해석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강하게 부정해왔던 것이 근거다. 푸틴 대통령은 침공 이전인 지난달 21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는 독립국이라는 게 없다.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 옛 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트로프스키 슈테른 교수는 N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은 1860년대 러시아 관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어나 우크라이나 국민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는 없으므로 주권도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