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 영화상인 아카데미 시상식에 배우 윤여정이 시상자로 참석해 재치 있는 입담과 진행으로 무대를 빛냈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주관하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27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극장에서 열렸다. 지난해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은 전년도 수상자가 시상하는 관례에 따라 남우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윤여정은 왼쪽 가슴에 유엔 난민기구의 ‘난민과 함께’ 캠페인을 상징하는 푸른색 리본을 달았다.
그는 “작년에 (시상식에서) 내 이름이 제대로 발음이 안 된 것에 대해 한소리 했는데 죄송하다”며 “이번에 후보자 이름을 보니 발음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윤여정표’ 입담은 좌중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지난해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을 때도 그는 “각자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맡았을 뿐 서로 경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이겼다”고 인상 깊은 소감을 남겨 화제가 됐다.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배우 트로이 코처를 호명하면서 윤여정은 먼저 수어로 수상자의 이름을 발표했다. 농인 배우인 코처를 배려한 것이다. 관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대신 양손을 흔들며 축하했다. 윤여정은 코처가 수어로 수상소감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트로피를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과거와 다소 달라진 풍경이었다. 그동안 아카데미는 다소 보수적으로 수상작을 선정해왔다. 워너브라더스, 월트디즈니 등 대형 영화사의 작품 위주였다. 그러나 올해는 넷플릭스, 애플티비 플러스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영화들이 선전했다.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은 애플티비 플러스 오리지널 영화인 ‘코다’에게 돌아갔다. ‘코다’와 치열한 접전을 펼친 작품 ‘파워 오브 도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다. 작품상 수상 후보로 거론된 두 작품이 모두 OTT 오리지널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코다’는 앞서 열린 감독조합상(DGA)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아카데미에서 최고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코다’가 작품상을 거머쥐면서 애플티비 플러스가 넷플릭스를 제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넷플릭스는 2018년 아카데미 후보에 ‘치욕의 대지’의 이름을 올렸으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이번에 넷플릭스는 지난 1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3관왕을 달성한 ‘파워 오브 도그’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 작품은 12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됐지만 작품상은 ‘코다’에 넘겨줬다.
‘코다’는 작품상을 포함해 남우조연상, 각색상까지 후보에 오른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대중에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코다’(Children Of Deaf Adult)인 10대 소녀 루비가 음악과 사랑에 빠지며 꿈을 향해 달려가는 뮤직 드라마다.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의 음악 감독 마리우스 드 브리스와 음악 프로듀서 닉 백스터가 참여했다.
이번 시상식에선 여성과 비백인, 성 소수자와 장애인 등이 조명을 받았다. ‘코다’의 주인공 루비의 가족은 모두 농인 배우들이 연기했다. 남우조연상을 받은 코처는 농인 배우로서 두 번째로 오스카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감독상을 받은 제인 캠피온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세 번째 여성이 됐다. 영화 ‘킹 리차드’에서 비너스·세리나 윌리엄스 자매를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길러낸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를 연기한 윌 스미스는 생애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역대 다섯 번째 흑인 배우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아니타를 연기해 여우조연상을 받은 라틴계 배우 아리아나 드보스는 공개적으로 성 정체성을 밝힌 퀴어로서 첫 아카데미 수상자가 됐다.
비백인계 주인공을 내세운 수상작들도 눈에 띄었다. 장편 애니메이션상은 콜롬비아 가족의 마법 이야기를 담은 ‘엔칸토’가 수상했다. 장편 다큐멘터리상은 흑인 커뮤니티를 다룬 음악 다큐 ‘축제의 여름(…혹은 중계될 수 없는 혁명)’이 차지했다.
뛰어난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명배우들이 자리를 빛낸 시상식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도 발생했다. 배우 윌 스미스는 배우 겸 코미디언인 크리스 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관중을 충격에 빠뜨렸다. 록이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의 민머리에 대한 농담을 하자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가 돌발 행동을 한 것이다. 이후 남우주연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오른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스미스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해서만 사과를 했다. 정작 폭행을 당한 록에게는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아 대중의 빈축을 샀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