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소재를 연대의 역사로 풀어낸 거장…‘패러렐 마더스’

입력 2022-03-27 20:27 수정 2022-03-28 06:05
병원에서 만나 우정을 싹틔우는 아나(밀레나 스밋, 왼쪽)와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같은 병원에서 한날 아이를 낳은 두 여자, 신생아실에서 아이가 뒤바뀐다.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비극이다. 사실을 모른 채 자란 아이 앞에 친모가 나타나고, 주인공들은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관객들에게 익숙한 흐름이다.

탁월한 이야기꾼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예상치 못한 전개를 선보인다. 사진작가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는 스페인 프랑코 독재정권 당시 실종된 증조할아버지의 시신 발굴을 추진하다가 법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임신한다.

사진작가 야니스와 사랑에 빠진 법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야니스는 아이를 낳지 말자는 아르투로와 헤어진 뒤 친구 엘레나(로시 드 팔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홀로 출산하기로 한다. 병원에 입원한 야니스는 같은 병실에서 아나(밀레나 스밋)를 만난다. 야니스는 성폭행을 당해 임신하게 된 17세의 불안한 산모 아나에게 용기를 주고, 두 사람은 짧고 깊은 우정을 나눈 채 헤어진다.

오랜만에 만나 “아이가 나를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르투로에게 야니스는 화를 내지만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딸을 보면서 점점 의문을 갖게 된다. 유전자 검사 결과 야니스는 자신과 딸 세실리아의 친자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듣는다. 아이를 잃을까 두려워진 야니스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아나와도, 아르투로와도 연락을 끊는다.

식탁 앞에 마주앉은 아나와 세실리아, 야니스(왼쪽부터).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얼마 후 집으로 자신을 찾아온 아나로부터 야니스는 자신의 친딸로 추정되는 아나의 딸이 돌연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몰래 의뢰한 유전자 검사에선 아나가 세실리아의 친모라는 게 밝혀진다. 가혹한 현실에 괴로워하던 야니스, 야니스의 집에서 안정을 찾아가던 아나는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 사이 과거 실종자들이 묻힌 장소를 찾아내는 아르투로의 작업도 빠르게 진행된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 작품 ‘패러렐 마더스’에서 비극적인 가족사는 신파로 끝나지 않는다. 아나와 야니스는 갈등을 겪지만 화해하고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영화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여성,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 연대하는 여성들 또는 엄마들이 있을 뿐이다.

아나의 엄마 테레사(아이타나 산체스 지욘)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멜로의 소재를 역사 이야기로 확장시킨 거장의 손길은 인상적이다. 아이를 혼자 낳은 여성들은 마침내 진실을 밝히고 과거사를 청산한다. 사랑과 괴로움, 모성 등 다양한 감정의 파도를 타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는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도와준다. 행위 예술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알모도바르의 뮤즈’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과 음악상 후보에도 올랐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번에 네 번째 아카데미상에 도전한다. 아이타나 산체스 지욘, 로시 드 팔마 등 여배우들의 앙상블도 빛난다.

야니스는 아이를 지키고 싶어하는 엄마이자 아이를 잃은 엄마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번 영화에서 다양한 감정을 겪는 인물을 섬세하게 연기해 호평 받았다.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화면에 담긴 알모도바르 감독만의 색감, 알모도바르 감독과 오랜 세월 함께 작업해 온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러닝타임 123분, 오는 31일 개봉.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