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마린스키 극장의 총감독 겸 음악감독인 발레리 게르기예프에게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의 운영 통합을 제안했다고 러시아 타스 통신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다음날 이 소식을 전한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는 러시아 발레사 전문가인 사이먼 모리슨 프린스턴대 교수의 인터뷰를 인용해 “푸틴의 제안은 최근 반전 서명을 하는 등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블라디미르 유린 볼쇼이 극장장에 대한 보복”이라고 지적했다.
타스 통신과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푸틴은 러시아 문화예술상 수상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게르기예프에게 러시아를 대표하는 두 라이벌 극장의 통합을 제안했다. 두 극장은 각각 오케스트라, 오페라합창단과 솔리스트 가수, 발레단 그리고 부속 발레학교를 거느리고 있다. 푸틴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지금의 마린스키극장) 관리국 아래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이 속해 있던 것을 지적했다.
비록 푸틴이 “두 극장의 운영 통합이 결정된 것이 아니다”고 말했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푸틴의 발언은 이미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의 공연예술계에 대대적인 변화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게르기예프는 푸틴의 제안에 대해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은 위대한 전통을 가진 오페라하우스지만 통합이 좀 더 많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볼 때”라고 맞장구를 쳤다.
푸틴과 오랜 친분을 자랑해온 게르기예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음악계에서 퇴출당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공식 입장 표명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푸틴에 충성스러운 그는 두 극장의 운영 통합과 관련해 “지난 2주 동안 올가 류비모바 문화부 장관과 세 차례 접촉했다”면서 “러시아에 새로 생기는 오페라극장들의 발전 및 젊은 예술가들의 기회 제공이라는 점에서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의 역할이 크다”고 덧붙였다. 마린스키 극장의 경우 푸틴의 극동 개발에 발맞춰 2016년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극장을 개보수한 뒤 마린스키 연해주 분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엔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이 우위를 점했지만 1917년 공산 혁명 이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면서 볼쇼이 극장의 위상이 높아졌다. 하지만 구 소련이 붕괴하고 200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푸틴이 대통령이 되면서 두 극장의 위상은 바뀌었다. 푸틴은 정보기관 KGB를 그만두고 상트페테르부크에서 정치인으로 나설 때부터 친밀하게 지낸 게르기예프의 마린스키 극장을 전폭적으로 후원했다. 특히 두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은 그런 변화를 더욱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모리슨 교수는 워싱턴 포스트에 “푸틴의 제안은 게르기예프 아래 마린스키 극장과 볼쇼이 극장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면서 “푸틴은 블라디미르 유린 볼쇼이 극장장에게 보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민공훈배우 출신으로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 단첸코 기념음악극장 극장장을 18년간 역임한 유린은 지난 2013년 볼쇼이 극장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자신의 취임 이전에 발생했던 세르게이 필린 발레단 예술감독의 황산테러 사건 등 불상사가 많았던 볼쇼이 극장을 여러 면에서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푸틴 정부가 제정한 반동성애법에도 불구하고 2017년 동성애자로 잘 알려진 망명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 소재 발레에 대해 일부 수정하도록 지시했지만 결국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유린은 지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름 반도 병합은 찬성했지만, 이번엔 러시아 예술계의 여러 지도자들과 함께 전쟁 중단 탄원서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볼쇼이 발레단에 안무하러 왔던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계약을 파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주는가 하면 모나코 발레단의 예술감독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안무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공연 허가 철회 요구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로 반전 메시지를 발표한 올가 스미르노바의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 이적을 허락해준 것은 결과적으로 푸틴 대통령에 타격을 줬다.
모리슨 교수는 “유린은 그나마 볼쇼이 극장의 심각한 관료주의를 제대로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서 “유린이 이번 시즌까지 볼쇼이 극장장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지금 분위기상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