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망원시장에 탱크…“우크라 아이들 어쩐댜”

입력 2022-03-25 18:08 수정 2022-03-25 18:41
24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의 한 생선 가게에 이제석광고연구소가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을 위해 설치한 모형 탱크가 놓여있다. 이한결 기자.

봄 내음이 물씬 풍긴 24일 오후, 국방색의 자그마한 탱크 10대가 평화로운 망원시장에 출몰했다. 탱크를 앞에 두고 상인들은 생선과 과일을 판다. 손님들은 탱크 위로 돈을 건네고 가게 주인은 검은 봉지에 물건을 담아 내민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탱크는 이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은갈치, 먹갈치, 가자미, 참조기의 값을 매긴 노란색의 화려한 가격표만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격표에 적힌 빨간 글자는 마치 탱크에서 흘러나온 핏물인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어? 뭐야?” 한 젊은 커플이 탱크를 보고 잠시 멈춰 선다. 3초 정도 탱크를 응시하더니 다시 가던 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뒤에 오던 아저씨가 탱크를 밟은 뒤 고함을 지른다. 혼자 분에 겨운 듯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씩씩거리다 자리를 뜬다. 탱크는 넘어지고 부서지고 밟히면서도 계속 전진한다. 그러다 한 속옷 가게 앞에서 멈춰 선다. 40년 동안 망원시장에서 면 팬티를 팔아왔던 김순례(가명‧82)씨의 눈물 때문이다. “내가 6.25 전쟁을 겪어봐서 알아.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어쩐댜…”

“러시아 탱크가 우리 밥상에 쳐들어옵니다”
이제석 대표가 24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을 위해 모형 탱크를 생선가게에 설치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이제석(39)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는 800원짜리 장난감 탱크 10개를 샀다. 몸체와 바퀴를 조립하고 탱크 위에 색을 입혔다. 800원짜리 탱크 하나가 우크라이나에 8000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장난감 탱크의 작은 크기는 오히려 이번 캠페인의 의도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벌레 만한 크기의 탱크, 우크라이나전을 인식하는 사람들 관심의 크기다.

이 대표는 마트와 시장을 캠페인 장소로 설정했다. ‘밥상 물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하는 가장 효과적인 키워드다. 우크라이나전으로 당장 바나나 가격이 급등했고, 연어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바쁜 출근길 식사 대용으로 먹던 바나나는 사과로 대체됐고, 헬스 마니아들은 도시락통에 연어 대신 닭고기를 담았다. 먼 나라의 전쟁이 사실은 우리 코앞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메시지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 대표의 망원시장 캠페인 현장을 동행했다.

“내가 전쟁 겪어봐서 알아. 아이들 어쩐댜…”
이제석 대표가 24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을 위해 모형 탱크를 생선가게에 설치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망원시장 남문에서 시장 안으로 500m가량 걸어가면 동문, 서문, 북문으로 빠질 수 있는 교차로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상가는 ‘진영청과’다. 알록달록한 과일이 층층이 쌓여 있고, 향긋한 과일 내음이 은은하게 퍼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가판대의 과일에 시선을 준다. 하지만 최근 진영청과의 매출은 마냥 달콤하진 않다.

이 대표가 탱크 작품을 설치할 때부터 호기심을 보이던 진영청과 주인 김민철(가명‧56)씨는 우크라이나전을 얼마나 체감하느냐는 질문에 “과일 가격이 직격탄 맞았지 뭐”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손님들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그런다니까. 가장 많이 팔리던 바나나가 한 다발에 2500원에서 4000원이 됐으니까 당연히 안 사려고 하지”라며 “수입 과일은 일단 들여오는 가격 자체가 높아졌어. 팔아도 이익이 얼마 안 남아”라고 말했다.

24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의 한 과일 가게에 이제석광고연구소가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을 위해 설치한 모형 탱크가 놓여있다. 이한결 기자.

가판대 앞에 설치된 탱크를 유심히 쳐다보던 커플에게도 우크라이나전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일이 아니었다. 망원동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양민주(가명‧31)씨는 “뉴스에서 계속 전쟁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전쟁 꿈도 꿨다”면서 “과일 가격 이런 것보다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했다. 양씨의 남자친구는 “지금 음악 작업을 하고 있는데 예전 미얀마 사태도 그렇고 이런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 국가나 사회적인 억압, 탄압 같은 것들이 창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24일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의 한 나물 가게에 이제석광고연구소가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을 위해 설치한 모형 탱크가 놓여있다. 이한결 기자.

망원시장 남문 밖을 빠져나오면 좁은 도로를 따라 나물 가게, 철물점, 속옷 가게, 한의원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배달 오토바이가 만들어 내는 먼지를 따라 ‘용하다한의원’ ‘참좋은한의원’ ‘손한의원’을 지나치면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나물 가게를 찾을 수 있다. 3평 남짓한 가게 앞 가판대에는 무말랭이, 찰수수, 자연 다시마, 늘보리가 담긴 포대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다. 가판대 위에는 ‘신토불이 망원 농산물’이라고 적힌 커다란 주걱이 백열전구 옆에 무심히 걸려있다.

신토불이 망원 농산물 사장님 박순자(가명‧56)씨는 “우리는 우리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파니께 뭐 전쟁 일어나도 영향 그런 거 없지”라면서도 “안타깝기는 하지. 사람이 죽는다니까. 빨리 끝나면 좋겠지만 뭐 내가 할 수 있는 게…”라며 말끝을 흐렸다. 박씨는 고춧가루를 찾는 손님의 재촉에 탱크를 지나쳐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물 가게 바로 앞에는 속옷 가게 하나가 서 있다. 가게 안에는 서양인의 체형을 가진 여자 마네킹이 세련된 포즈로 서 있다. 마네킹의 손과 발은 몇십 년 동안 가게를 지켜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까만 먼지로 뒤덮여 있다. 40년간 망원시장 같은 자리에서 장사해온 김순례씨는 나물 가게 앞을 지나는 탱크 장난감을 보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6.25 전쟁이지 뭐여…내가 6.25 전쟁을 겪어서 알지. 그때 배고프고 불안했던 것 생각하면 너무 찡하지. 얼마나 불안에 떨겄어. 어린아이도 많을 텐데 그걸 다 어쩐댜. 빨리 끝나야 혀. 지금 시대에 전쟁이 뭐여, 전쟁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24일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 주유소 앞에 이제석광고연구소가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을 위해 설치한 모형 탱크가 놓여있다. 이한결 기자.

망원시장을 빠져 나와 합정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역 바로 앞에 커다란 SK주유소가 있다. 주유소 옆에 적힌 휘발유, 경유 가격은 며칠째 앞자리 수가 ‘2’에 멈춰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나오는 운전자들은 급격히 오른 기름 가격에 화를 내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며 체념했다.

주유소 내 설치된 탱크를 보고 누가 놓고 간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다는 최동수(가명‧54)씨는 “원래 가득 채우면 8만원이었는데 지금은 11만원으로 올랐다. 한 달로 치면 60만원에서 80만원으로 오른 건데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기름값으로 체감된다. 빨리 전쟁이 끝나야 기름값이 좀 안정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석 “전쟁은 휴대전화에서 일어난다”

이제석 대표가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우크라이나 관련 반전 캠페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1년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제기한 도발적 명제는 실제 일어나는 전쟁이 미디어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한 문장으로 보여줬다. 보드리야르는 미디어에 보도된 걸프전이 실재하는 전쟁을 대체해 현실이 됐다고 주장했다. 지금, 2022년 사람들은 휴대전화로 우크라이나전을 하나의 콘텐츠처럼 소비한다. 우리에게 전쟁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휴대전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이 대표의 생각을 물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나.
“전쟁은 휴대전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대한 감각이 없죠. 사람들은 게임인 줄 알아요. 오락, 게임 이런 콘텐츠의 자극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느낌이 없는 거죠. 휴대전화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반응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오프라인 캠페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있습니다. 사실 메타버스라는 개념, 이것도 굉장히 무서운 것이죠. 이제 현실은 없어요. 관념의 세계가 온 것이죠.”

-우리나라는 북한 때문에 항상 전쟁 가능성이 있는데.
“뿌리 깊은 안전 불감증이 있는 거죠. 나라 밖에 있는 외국 사람이 우리를 걱정하지 막상 한국 사람들은 태연해요. 북한에서 매일 미사일을 쏴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니까. 당장 여의도에 폭탄이 떨어져도 망원시장 상인들은 계속 장사할 거고, 주유소 아저씨는 기름 팔고 있을 거예요. 내 두 손에 피해가 느껴지지 않으면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거죠. 제가 강원도를 종종 가는데 바다를 가면 한쪽에서는 수영복을 입고 놀고 있고, 바로 옆에서는 피 끓는 청춘들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죠. 전쟁이 일상의 일부분이 돼버렸어요.”

-과거 반전 포스터로 전 세계 광고상을 휩쓸었는데.
“제가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라크전이랑 테러 때문에 검문이 엄청 심했어요. 길 가다가 갑자기 가방을 보자고 하고 뒤지는데 굉장히 불쾌하죠. 공항에 가도 30분 걸릴 일이 2시간 걸렸고. 지하철을 타면 무장한 군인들이 쫙 깔려 있었죠. 이렇게 사회 전체가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보고 빨리 전쟁이 끝나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전쟁으로 인해 전쟁터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전쟁터 밖에 있는 사람들도 고통을 받는 거죠.”

-공익 광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세상을 도화지 삼아 뭘 그렸을 때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광고를 해서 특정 공간을 물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한테 계속 인식의 씨앗을 던져주려고 해요. 그 씨앗으로 사람들 생각의 방향이 바뀐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에 계속 광고를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들이 말하지 않는 걸 광고로 말하는 게 제 역할이에요. 남들이 다 돈 계산만 하고 있을 때 제가 더 큰 걸 보고 사회에 사이렌을 울려주는 것,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광고천재’라는 수식어로 유명한 이 대표는 25세였던 지난 2007년 세계 최대 광고제인 ‘원 쇼 칼리지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클리오 어워드, 애디 어워드 등 권위 있는 국제 광고제에서 메달을 휩쓸며 이름을 날렸다. 수상작 중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포스터는 현재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 실려 있다. 2009년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설립한 후 공익 광고에 주력하고 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 서민철 황서량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