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마지막 독립 방송국인 도쉬티(Dozhd) TV가 지난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정부의 강화된 통제 방침과 폐쇄 위협에 따라 방송을 중단했다. 서방에 영어명인 티브이 레인(TV Rain)으로 잘 알려진 도쉬티 TV는 그동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을 전하면서 당국의 조사를 받아왔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전쟁’이나 ‘침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해방하고 나치주의자들을 없애 인민을 보호한다는 게 공식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의회는 4일 자국 군대의 활동에 관해 허위 정보를 유포하거나 군의 신뢰를 훼손하는 언론에 형사처벌(최대 징역 15년)을 가하는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날 도쉬티 TV가 직원들이 ‘전쟁 반대’를 외치고 뉴스룸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 뒤 마지막 방송으로 내보낸 것은 발레 ‘백조의 호수’의 오래된 영상이었다. 차이콥스키 음악으로 프티파가 안무한 ‘백조의 호수’는 발레를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정치적 격변’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러시아의 독립신문 노바야 가제타가 지난 9일 “개정된 법을 준수한다”는 문구와 함께 1면에 거대한 버섯구름 앞에서 ‘백조의 호수’ 속 4명의 발레리나 이미지를 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바야 가제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러시아 신문 가운데 처음으로 1면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하고 있다”는 문장을 실은 바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사실대로 전하면 최근 개정 법률에 따라 처벌받게 되기 때문에 이런 상징적인 지면을 만든 것이다.
러시아에서 ‘백조의 호수’가 방송이나 신문에서 갑자기 등장하면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는 중임을 상징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지난 2015년 무용사학자 재니스 로스가 펴낸 책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레오니드 야콥슨과 소련에서 저항으로서의 발레(Like a Bomb Going Off: Leonid Yakobson and Ballet as Resistance in Soviet Russia)’에 따르면 제5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18년간의 집권 끝에 1982년 사망했을 때 당시 국영 TV 방송국들은 사망 소식을 바로 전하는 대신 약 3시간 정도인 ‘백조의 호수’ 전막을 방송했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가 후계자를 결정하는 동안 뉴스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시간 끌기였던 셈이다. 같은 일이 제7대 유리 안드로포프와 제8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사망했단 1984년과 1985년에도 일어났다.
그리고 1991년 8월 고르바초프 정권 시절 3일 만에 끝나긴 했지만,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러시아 국영방송은 첫날 ‘백조의 호수’를 내보냈다. 당시 쿠데타 지도부는 쿠데타 뉴스를 늦추기 위해 ‘백조의 호수’를 틀도록 했는데, 휴가 중이던 의회 의원들이 이를 보고 모스크바에 돌아가 보수파에 맞서면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게 됐다. 이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 일반인들에게 갑작스러운 ‘백조의 호수’ 방송은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는 중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게 됐다.
‘백조의 호수’가 내포한 정치적 의미는 우크라이나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2014년 4월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합병한 직후 하얀 백조 의상을 입은 무용수 4명이 오데사 군사역사박물관 야외무대에서 춤췄을 때 동행한 정치인은 “소련에서 ‘백조의 호수’의 갑작스러운 TV 방영은 국가 지도부의 변화를 의미했다”면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실각을 염원했다. 이듬해인 지난 2015년 3월 푸틴이 열흘 정도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됐을 때 우크라이나에서 푸틴의 부재를 추적하는 웹사이트가 만들어졌는데, 그때 배경 화면 역시 ‘백조의 호수’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