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침공 대가는 ‘지옥 경제’… 러, 80년대 수준 추락

입력 2022-03-23 07:03 수정 2022-03-23 13:51

#1. 러시아에서 활동을 지속 중인 다국적 기업 네슬레와 유니레버는 러시아 소매점에 4월부터 제품 가격을 45% 인상한다고 통보했다. 이들 업체는 서방 제재, 루블화 환율 하락, 물류와 원자재 및 포장가격 상승을 이유로 들었다.

#2. 러시아 보험사들은 제재와 그에 따른 부품 부족, 시민의 생활 수준 저하와 실업 문제로 자동차 도난 건수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폭스바겐, BMW, 메르세데스-벤츠, 볼보 등 러시아 시장을 떠난 모든 제조사 자동차가 이 같은 위험에 노출됐다고 한다.

#3. 최근 여론조사에서 의사들은 러시아 약국에서 80개 이상의 약품을 찾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항우울제 및 항정신병 약물, 염증제, 위장약, 항경련제, 인슐린 등의 약품 부족이 보고됐다. 전문가들은 수요 급증 때문으로 분석했다. 러시아 시민들이 필수 의약품 사재기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4. 러시아 대형은행 스베르방크 계좌에서 중국 온라인 결제 플랫폼 알리페이 가상 지갑으로의 이체 서비스가 중단됐다. 스베르방크는 이미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으로 송금 기능도 중단했다. 전문가들은 외국 은행들이 2차 제재 위협 때문에 스베르방크와 직접 협력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5. 러시아 IT 전문가는 “국가에 비판적인 기술자 최대 7만 명가량이 이미 러시아를 떠났고, 4월 최대 10만 명이 더 출국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하루 러시아 언론에 언급된 서방 제재 피해 상황이다.

달립 싱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 겸 국가경제위원회(NEC) 부위원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경제를 고립시키고 있다. 러시아는 이제 1980년대 스타일의 소비에트 생활 수준으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24일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 달을 맞았다. 빠른 진격으로 조기에 점령을 끝내고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부를 세우겠다는 푸틴 대통령 초기 목표는 완전히 실패했다.

실패가 쌓이는 만큼 피해도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다. 푸틴 대통령 고문 출신인 세르게이 글라지예프 EAEU 통합·거시경제 장관은 러시아 주간지 아르구만티에 ‘지옥 같은 제재’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서방의 대응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재래식 군사 무기를 앞세운 러시아의 20세기 ‘하드 파워’ 전략에 서방은 자유·민주주의 시장 동맹의 경제·금융·무역 제재로 맞서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백악관 기자실에 군 장성 대신 싱 부보좌관이 등장한 건 서방의 이런 의도를 상징한다. 싱 부보좌관은 푸틴 대통령을 겨냥한 서방의 경제·무역 제재를 설계한 인물이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할 때도 미 재무부에 근무하며 제재에 관여했다. 푸틴 대통령의 목을 죌 무기가 경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전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우리는 일관되게 3가지 노력을 추구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돕고, 유럽과 인도·태평양, 기타 지역 동맹 파트너와 긴밀히 협력해 전례 없는 제재로 러시아가 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전력 태세를 강화해 러시아 침략을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는 서방 전략이 먹혀들고 있다. 설리번 보좌관은 “러시아의 권력과 위신이 심각하게 고갈됐다. 러시아 경제는 흔들리고 있고, 첨단 기술 및 방위 산업 분야는 질식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루블화 가치는 이날 현재 0.0094달러다. 1센트 가치도 못한다. 모스크바 증권거래소는 한 달 만에 겨우 국채 거래만 재개했고, 국제 신용평가사는 러시아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경고했다. CBS 방송은 “볼셰비키 혁명 기간인 1918년 이후 발생한 적이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의 대가

경제 제재의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 최대 철강기업인 세베르스탈은 달러화 채권에 대한 이자 지급을 제때 못 해 이날 부도 위기에 몰렸다. 세베르스탈은 1260만 달러를 미국 시티그룹 계좌로 이체했는데, 금융제재 탓에 자금이 채권 보유자로 전달되지 못했다.

러시아 자동차 산업도 외국 부품 부족으로 문을 닫고 있다. 러시아의 주력 여객기도 엔진과 기타 핵심 부품을 해외 공급업체로부터 받고 있다.

독일 국제안보문제연구소 러시아 경제 전문가 야니스 클루게는 “러시아와 같은 소규모 경제는 복잡한 첨단 기술 제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어서 (자급자족이라는) 러시아 야망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이었다”며 “러시아 경제는 이제 훨씬 더 원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조사에서 러시아 제조업체 81%는 사용 중인 수입 부품의 국산화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 연구에 따르면 2020년 러시아 소매 시장에서 비식품 소비재 75%가 수입품이었다. 트럭 제조업체 카마즈는 지난 16일 “서방 제재로 인해 최대 40% 생산량 감소에 직면했고, 공급망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직원 1만5000명이 휴직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강점인 에너지 산업도 불안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는 노후화된 유전과 가스전을 서구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며 “러시아 에너지 회사들은 제재로 인해 프로젝트를 연기하거나 취소해야 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자국 기술로의 대체는 프로젝트를 재가동하기에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WSJ는 “러시아는 서방 제재에 맞서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수입품을 줄이려고 수년을 보냈다”며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부과된 제재의 영향은 이런 모스크바의 노력이 효과가 없었음을 분명히 했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주 연설에서 “우리 경제는 새로운 현실에서 구조적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인정했다.

푸틴 대통령 발언 이후 러시아는 러시아 경제의 자급자족 가능성을 연일 홍보하고 있다. 엘비라 나비울리나 중앙은행 총재는 “국내에서 특정 상품을 생산하는 게 (그동안은) 수익성이 없었지만, 이제 기업들이 흥미를 보인다”고 말했다. 러시아 경제 제재가 자립을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리아 샤지나 핀란드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러시아 은행과 회사의 최대 90%가 서양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며 “저기술 품목 대체는 가능하지만, 첨단 기술은 서구 노하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 부보좌관은 “이는 (러시아의) 경제적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푸틴이 선택한 결과”라고 말했다.

서방의 제재 목록

서방의 제재는 푸틴의 권력을 위협할 만큼 직접적이었다. 러시아 침공 72시간 이내에 미국과 서방 동맹은 국제은행결제시스템인 스위프트(SWIFT)에서 대부분의 러시아 금융 기관을 차단했다. 러시아 억만장자 수십 명의 해외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수억 달러 규모 요트 등 자산을 압수했다.

가장 파괴적인 제재는 러시아 중앙은행을 겨냥한 것이다. 서방동맹은 러시아 중앙은행이 미국, 유럽, 아시아에 은닉한 3000억 달러 규모의 외화 보유액을 차단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30개국 이상이 푸틴 대통령 등 개인을 포함해 러시아에 대한 2500건의 제재를 가했다.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400개 이상의 기업이 사업을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