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 달 가까이 지속하면서 서방 동맹도 중대 기로에 접어들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서방은 제재 장기화로 인한 내부적 피로감을 극복하고 단일 대오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러시아 침공이 점점 더 잔혹성을 드러내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저지할 추가 조치 등의 카드를 꺼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내부에서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 방안을 지지하는 회원국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애초 유럽은 에너지 제재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과 인접한 우크라이나 국경으로까지 공격을 확대하고,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 피해도 키우면서 더 적극적 제재 필요성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폴란드와 발트해 국가들이 먼저 적극적 목소리를 냈다. 가브리엘리우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트위터에 “왜 유럽은 푸틴 대통령에게 석유와 가스로 돈을 벌 시간을 더 줘야 하느냐. 플러그를 뽑을 때”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스웨덴과 아일랜드, 슬로베니아, 체코 등도 검토해 볼 만하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으로 WP는 보도했다. 사이먼 커베이니 아일랜드 외무장관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각종 파괴 행위를 지켜보면 러시아 에너지 금수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원유 금수 조치가 여전히 EU 내부에서 합의가 어려운 이슈라는 데 있다. 로이터통신은 “EU 외무장관들이 러시아 주 수입원인 에너지 부문에 대한 제재를 가할 것인지 여부와 방법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며 “미국과 영국이 한 것처럼 러시아 에너지 수출을 목표로 삼는 건 EU 27개국에는 분열적 선택지”라고 분석했다.
익명의 EU 관계자는 “에너지 문제는 국가마다 고유한 ‘레드 라인’이 있어서 가장 복잡한 제재 대상”이라며 “발트해 3국은 석유 금수 조치를 원하지만,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과 이탈리아는 소극적”이라고 로이터에 말했다.
안나레나 배어복 독일 외무장관은 “석유 금수 조치 문제는 우리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헝가리,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도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더욱 극단전술을 펴며 서방 동맹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최근 지속 제기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생·화학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거짓 깃발 작전”이라며 “이는 그가 이 두 가지 무기를 모두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인플레이션 확대로 인한 고통 가중이 서방 동맹을 압박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EU 내부에선 곡물과 비료 가격 폭등으로 인한 식량 위기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23일 유럽 방문이 이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24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잇따라 참석한다. 25일에는 폴란드를 방문해 안제이 두다 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한다.
전문가들은 서방 동맹 정상들의 연쇄 회의 때 대러 추가 조치의 윤곽이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EU는 원유 금수 외에 러시아 선박의 EU 정박 금지, 기존 스위프트 제재 대상 은행 확대 등 조치를 고려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 순방에 앞서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통화하고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백악관은 성명을 내고 “정상들은 민간인에 대한 공격 등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잔혹한 전술에 대한 심각한 우려에 대해 논의했다”며 “용감한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안보 지원, 폭력을 피해 대피한 수백만 명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 등 지속적인 지원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