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북악산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푸른 지붕의 건물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이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회의실·접견실·주거실 등이 있는 2층 본관과 경호실, 비서실 및 영빈관 등의 부속 건물, 그리고 정원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후원 및 연못 등의 미관을 갖추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당선인이 직접 “청와대를 국민께 돌려드리겠다”라고 밝힌 만큼 기존 대통령 관저와 청와대 부지의 역사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청와대가 있는 장소는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년) 때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천의 모양과 기운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이 풍수지리설은 인간과 세상, 특히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미리 예언할 수 있다는 소위 도참사상과 연결됐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크게 의존했다.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도읍이었던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 세 곳을 ‘삼경’이라 하여 주요 지역으로 여겼다. 현재로 따지면 개경은 수도, 서경과 동경은 광역시 정도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1104년 고려 숙종은 훗날 조선의 수도가 될 한양(지금의 서울) 지역을 남경으로 삼아 이궁(離宮)을 두었다. 이것이 청와대의 첫 모습이다.
청와대 자리는 조선 건국 후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역사에 다시 등장했다. 1394년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었다. 태조는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지었다. 고려 숙종 때의 남경 이궁 자리가 너무 좁아 궁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궁궐을 지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궁궐이 바로 경복궁이다.
이후 수많은 사건들이 조선을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신무문 뒤편에서 조용히 왕실을 지켰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년) 즉위 후 경복궁이 다시 복원되면서 후원 자리에 ‘경무대’가 건축되었다. 당시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안에 지으면서 현재 청와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세웠다. 해방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의 명칭이었던 경무대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명칭은 일제강점기의 총독 관저가 아닌 고종 황제 때 인재 등용의 현장이었던 경무대를 계승한 것이다.
1960년 4·19혁명 이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은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경무대’라는 명칭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는 청와대로 공식 개명됐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본관 건물에 ‘푸른 기와’를 덮은 데서 유래됐다. 청기와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이며 동시에 영어 명칭인 ‘Blue House’가 미국의 백악관을 뜻하는 ‘White House’와 비견된다고 해 채택됐다. 이후 청와대라는 명칭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 등으로 사용되는 장소의 총체적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배규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