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장’ 이우환 에세이 “말로 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입력 2022-03-20 16:11
화가 이우환. 국민일보 자료사진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한국 생존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작가, 이우환(84)의 에세이 ‘양의의 표현’(현대문학)이 출간됐다. 2018∼2021년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이 주축이고 틈틈이 메모해온 단상과 외국에서의 강연 원고, 미발표 원고 등을 함께 묶었다. 2002년 ‘여백의 예술’ 이후 20년 만에 선보이는 두 번째 예술 에세이다.

수록된 64편의 글은 이우환의 예술론이자 작품에 대한 해설집, 작가에 대한 설명서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의미는 일본에서 처음 출간됐을 때 나온 평처럼 “천재 예술가의 감각 그 자체를 체감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이 책에 실린 ‘나의 제작의 입장’이나 ‘여백 현상의 회화’, ‘표현으로서의 침묵’ 같은 글은 이우환 예술의 비밀을 어느 정도 풀어준다. 그는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경우, 그것은 그리지 않은 곳과 건네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출발점에 착목하여 나는 새로운 회화를 짜내게 되었다”고 했다. 또 자신의 작품에서 침묵을 느낀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언급하며 “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울리지 않는 소리, 들리지 않는 말과 만나고 싶”고 “그림을 통해 말로 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의 차원을 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사조로 자리 잡은 단색화의 전개에서도 이우환의 이름은 빠질 수 없다. 그는 “단색화는 가난하고 어둡고 가혹한 상황 속에서, 그야말로 시대의 상징처럼 나타났다”며 “한국에서 단색화가 집단적으로 출현하여 존속하고 지금까지 전개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경이이자 하나의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거인이 있었다’는 작고한 이건희 전 삼성그룹 명예회장을 기리는 글이다. 그는 “내겐 이건희 회장은 사업가라기보다 어딘가 투철한 철인이나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되었다”고 회고했다. 또 선대 이병철 회장에게 “고미술 사랑은 이상하리만큼 집념이 강했고, 한국의 전통을 지극히 중요시하는 애호가적 경향이 있었다”면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미술품이라고 하더라도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언제나 전문적·예술가적 시야로 작품을 선별했다”고 비교했다.


화가가 되기 전까지 문학을 꿈꾸었다는 이우환은 평생 그림과 글을 함께 해왔다. 그는 저자 후기에서 “내게 글을 쓰는 것은 끊임없이 발상을 발굴하고, 생각을 심화하거나 정리하는 것이므로 한시도 펜을 멀리한 적은 없다”며 “미술과 문필이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며 저마다 독특한 전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