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슬레는 러시아 정부에 세금을 내고, 푸틴에게 시민과 어린이를 죽일 돈을 주려고 러시아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국제해커집단 어나니머스는 트위터에 스위스 기업 네슬레에 대한 불매운동 독려 글을 올렸다. 네슬레가 러시아에서 철수하지 않기로 하자 보이콧 운동에 나선 것이다. 해당 트윗은 하루 만에 14만1000회 이상 리트윗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19일(현지시간)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 화상으로 참여해 “네슬레 슬로건은 ‘좋은 음식, 좋은 삶’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의 사업은 아이들이 죽고 도시가 파괴돼도 작동한다”고 비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미 의회 상·하원을 대상으로 한 화상 연설에서도 “미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러시아를 규탄하는 반전 시위가 러시아와의 관계 유지를 지속하는 업체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며 러시아에 대한 비난 여론이 시들지 않은 데 따른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3주 만에 러시아에서 발을 뺀 다국적 기업 수도 400곳을 넘어섰다. 반러 정서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자칫 친러 기업으로 찍히면 브랜드 이미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 기업들이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미국의 주요 석유 회사인 베이커 휴즈는 이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러시아에서의 사업 철수를 발표했다. 경쟁 회사인 할리버튼과 슐럼버거도 전날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미국 제재에 대응해 러시아에서 사업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할리버튼은 수 주 전부터 제품 선적을 중단했고, 합작 투자도 하지 않겠다고 설명했다. 슐럼버거는 신규 투자를 중단하고 상황을 모니터링 하기로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업들이 사업에 대한 평판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예일대 최고경영자리더십연구소는 러시아에서 활동해온 다국적 기업들의 조치를 분석해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만 나눴는데, 최근에는 실질적인 조치 내용을 바탕으로 5개 그룹으로 구분해 목록을 공개 중이다.
연구소에 따르면 이날 현재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업체는 165곳이다. 에어비앤비, 이베이, 넷플릭스, 셸, 우버, 스와로브스키 등 기업이 1그룹 명단에 올랐다. 2그룹은 향후 복귀 가능성을 열어둔 채 일시적으로 사업을 중단·축소한 업체들이다. 3M, 아디다스, 나이키, 아마존, 비자, 마스터,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 등 업체 185곳이 이름을 올렸다. 삼성, LG, 현대 등도 이 그룹에 포함됐다.
골드만삭스, HSBC, JP모건 등 25곳은 일부 사업을 축소한 3그룹 업체로 분류됐다. 던킨, 하얏트, 화이자 등 50개 기업은 실질적인 사업은 계속하면서 신규투자나 개발, 마케팅 등을 중단한 4그룹에 속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비판한 네슬레도 같은 그룹이다.
이들 그룹도 소비자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화이자는 “비필수적 운영을 중단하지만, 당뇨병이나 암과 같은 질병에 대한 약물 공급은 계속할 계획”이라며 “러시아에서의 수익 일부를 인도적 구호 자금으로 분류하겠다”고 설명했다. 노바티스와 바이엘도 우크라이나에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보스 등 33개 기업은 철수를 거부하고 활동을 지속하는 5그룹에 속해 있다.
러시아에서의 기업 활동 목록 공개를 주도한 제프리 소넨펠드 수석 부학장은 “처음으로 목록을 공개한 날 러시아에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난 기업 주가가 15~30%가량 하락했다”며 “대중의 압박, 기업 평판에 대한 우려가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사상자와 난민이 증가하면서 러시아에서 완전히 사업을 철수하라는 압박이 커지고 있다”며 “식품, 의약품 같은 필수품을 제공하는 서방 기업들은 푸틴 정부와 우크라이나 지지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투자회사 페더레이티드 헤르메스의 한나 슈스미스 이사는 “기업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