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여성과 어린이가 포함된 사상자 수를 보고 받는 심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이 전쟁에서 사망한 어린이가 97명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캐나다 하원 의회 화상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거듭 요청하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제발 하늘을 닫아 달라”며 11분간 연설할 때 여러 차례 박수도 쏟아졌다. 연설이 끝났을 땐 의원들이 모두 일어나 ‘슬라바 우크라니’(Slava Ukraini·우크라이나에 영광을)를 외쳤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6일 미 의회에서도 같은 연설을 할 예정이다. 더힐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은 엄청난 정치적 드라마의 순간이 될 것”이라며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전투기 등 군사지원 요청이 조 바이든 대통령을 압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폴리티코도 “젤렌스키 대통령 연설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편할 정도로 높은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바이든 대통령과 양당 의원 다수는 미·러 전면전 촉발 우려를 이유로 비행금지구역 설정 조치에 부정적이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와의 긴장을 촉발하고, 전쟁을 확대할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폴란드 등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을 공습하며 공격 범위를 넓히고, 민간인 사상자 피해도 계속되자 미국 내부에서도 찬성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한다면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롭 포트만 상원의원도 “미사일 공격이든, 비행기 공격이든 포탄이 날아오고 있는 곳은 하늘”이라며 비행금지구역 지정을 요구했다. 제3차 세계 대전 촉발 우려에 대해서는 “푸틴은 (경제) 제재도 전쟁 행위라고 했다. 우리가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할 때도 불만을 터뜨렸다”며 “그게 왜 사실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직 국방·국무부 관료 등 미 외교·안보 전문가 27명은 최근 바이든 대통령에게 “민간인 대피를 위한 ‘인도주의 통로’ 상공에 제한적으로 비행금지구역을 지정하자”고 제안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에블린 파커스 전 국방부 차관보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죽이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불필요한 제한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선 에스토니아 의회가 전날 처음으로 유엔 회원국들에 우크라이나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기 위한 즉각적 조처를 촉구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미국이 비행금지구역을 지정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공화당 지도자인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대표도 이날 “우리는 군대를 나토 전선 너머로 배치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면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비행금지구역을 시행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요구는 존중하지만, 우리가 내린 결정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제한적 비행금지구역 지정 요구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이 나온다. 제임스 액턴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연구원 등 외교안보전문가 78명은 가디언에 “우리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비행금지구역에 대한 무모한 요구를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는 반대 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비행금지구역을 선언하면 러시아군이 이를 지킬 것으로 생각하는 건 순진한 일”이라며 “러시아와의 전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 “우크라이나 국경 너머로 확장되는 전쟁은 유럽 전역에 피해를 주고 나토 동맹을 약화할 수 있다”며 “바이든 행정부는 도박을 피하고 적절한 외교적 수단과 경제적 압력을 계속 사용해 갈등을 종식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