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김지영(44)은 지난 2019년 6월 ‘지젤’을 끝으로 국립발레단을 퇴단했다. 1997년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부속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마치고 19살의 나이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이듬해 수석무용수로 발탁됐다. 이후 2002~2009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다 다시 복귀한 그에게는 ‘국립발레단의 영원한 프리마 발레리나’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22년간의 직업 무용수 생활을 마치고 2019년 9월 경희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한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무대에 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M발레단의 ‘돈키호테’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같은 전막발레를 비롯해 크고 작은 갈라 무대에 섰다. 오는 25일 마포문화재단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김지영의 ONE DAY’는 그가 출연하는 것은 물론 예술감독으로서 직접 프로그래밍 및 캐스팅을 했다.
“그동안 이미 기획된 공연에 제가 캐스팅됐다면 이번엔 처음으로 제가 직접 공연을 기획하고 무용수들을 캐스팅했습니다.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니 제가 예전엔 참 편하게 무대에 섰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영의 ONE DAY’는 리노베이션을 거쳐 올해 재개관한 마포아트센터가 발레 스타들과 함께하는 ‘M 프리마돈나’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공연이다. 1부에서는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 손유희 이현준 강민우와 솔리스트 한상이 등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호흡을 맞춰온 동료 및 후배들과 함께 발레 갈라를 선보인다. 김지영과 국립발레단 시절 콤비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국내 대표적 발레 안무가로 활동하는 김용걸의 ‘산책’ ‘선입견’과 함께 이현준이 새롭게 안무한 ‘한여름밤의 꿈’ 파드되(이인무)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2부에선 발레리나에서 안무가로 보폭을 넓히고 있는 김세연이 김지영을 위해 만든 신작 ‘치카치카(Chica Chica)’를 선보인다.
“국립발레단 퇴단 이후 주변에서 공연을 직접 기획해 보라는 권유를 받아왔는데요. 계속 고민만 하다가 이제야 첫 발걸음을 뗐습니다. 이번에 출연자들도 그렇고 영상, 사진, 포스터까지 ‘지인 찬스’를 톡톡히 쓰고 있습니다. ‘김지영다운’ 공연을 고민하다가 클래식 갈라 레퍼토리만으로 채우는 대신 창작 레퍼토리를 가미했습니다. 과시적인 화려함 대신 잔잔한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특히 이번 공연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치카치카’다. 치카(chica)는 원래 스페인어로 소녀라는 뜻이며, 반복하면 우리나라에서 어린아이가 양치질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김세연이 안무한 이 작품은 어린 소녀가 양치질을 배우듯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그렸다.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발레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스페인 국립발레단에서 활약한 김세연은 지난 2017년 안무가로 데뷔했다. 김세연은 오랜 우정을 이어온 김지영이 평소 ‘내 안에는 소녀가 살고 있다’고 말하곤 하던 데서 작품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무대에 등장하는 4명의 무용수는 각각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 의기양양한 젊은 시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중년 등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들 4명의 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제가 나이를 먹었어도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등 여전히 철이 안 들었어요. 마음도 여린 편인 데다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지금도 배우는 게 많습니다. 그런 제 이야기를 세연이가 귀담아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 삶의 의미있는 순간들을 담은 이 작품에서 한여름의 열정과 늦가을의 쓸쓸함 같은 감정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공연 레퍼토리들 가운데 그는 ‘산책’과 ‘치카치카’에 출연한다. ‘산책’은 예전에 그가 김용걸과 자주 췄던 작품이지만 이번에는 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이자 베를린 슈타츠오퍼 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했던 발레리노 이승현과 호흡을 맞춘다. 그리고 ‘치카치카’는 전 독일 라이프치히발레단 단원 박정은, 전 우루과이발레단 단원 윤별 그리고 이승현과 함께한다.
“가끔 무대에 서고 있지만, 직업 무용수 시절과는 몸이 달라요.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요. 이번 공연을 앞두고 발레 클래스 외에도 운동하며 체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프로 시절과 비교해 무용수로서 기량은 하향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발레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무대에 대한 중압감이 줄어들면서 발레의 본질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발레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면 지금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를 먹으며 지혜가 쌓인 결과겠죠. 예전엔 평소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하게 춤췄다면 지금은 미식가처럼 음식을 음미하듯 춤을 춰요. 프로 무용수처럼 많은 시간을 춤에 투자하지 못하는 대신 깊이 연구하게 되더라고요. 젊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생겨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발레에 대한 그의 시선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성격이 급한 탓에 처음에는 학생들이 내놓는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스트레스도 받았다. 하지만 점차 학생들이 잘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면서 인내심이 생겼다.
“학생 지도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학교에 올 때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었어요. 하지만 직접 가르치면서 제가 오만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저 자신도 많이 배웁니다.”
화려했던 프로 무용수 시절은 막을 내렸지만, 김지영은 교수이자 프리랜서 발레리나로서 새로운 무대의 주역으로 빛나고 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