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A노선 건설현장에서 30대 하청노동자가 드럼(긴 전선을 감아둔 나무통)에 깔려 숨진 사고 원인을 두고 원청인 DL이앤씨(구 대림산업)가 “작업계획과 전선드럼의 고정이 불량했다”는 내용의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초기 보고서이지만 현장 과실이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고 발생 직후 119 신고가 30분 지연된 정황도 드러났다.
15일 국민일보가 입수한 DL이앤씨의 ‘GTX-A 5공구 현장 중대재해 발생 보고’에서 사측은 ‘전선드럼 고정 불량’ ‘중량물 취급 작업계획 불량’ ‘고위험 Spot(지점) 선정·관리 미흡’ 3가지를 사고 원인으로 언급했다. 작업자 부주의 등의 언급은 없었다. 이 문서는 사고 초기 원청이 내부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DL이앤씨 측은 “정확한 원인은 조사 중이라 추측해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하청업체 소속 현장관리감독자 A씨(38)는 지난 13일 오전 10시11분쯤 서울 종로구 당주동 GTX-A노선 5공구의 18번 환기구 지상에서 무게 100㎏ 드럼에 깔렸다. 터널 공사를 위해 전선을 깊이 70m 수직구 아래로 내리던 중 드럼이 굴러 A씨를 덮친 것이다. 그는 지상부 드럼과 수직구 난간 사이에 있다 변을 당했다.
특히 DL이앤씨는 해당 문건에서 중량물 취급 작업계획이 불량했다며 ‘크레인→인력’이라는 표현을 보고서에 추가로 적시했다. 무게를 감안할 때 크레인을 활용해야 했지만 직접 손으로 작업하다 사고가 발생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 국민일보 취재 결과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손으로 전선을 내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현장에는 원청 소속 작업관리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선 드럼이 제대로 고정돼있지 않았다는 점도 언급됐다. 전선을 이동 시킬 때는 드럼을 고정할 수 있는 거치대를 설치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서울고용노동청 관계자는 “드럼이 고정되지 않아 무게가 확 쏠리면서 피해자가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A씨를 덮친 드럼은 수직구 지하 입구 난간에서 겨우 멈췄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평소 70m 아래 지하에서도 작업이 진행 중이었지만 다행히 이날은 일요일이라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고용청 관계자는 “드럼이 떨어지거나 난간까지 쏟아져 내렸다면 여러 명이 사망하는 대형참사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119에 신고가 늦게 접수된 사실도 새로 확인됐다. 서울 종로소방서는 사고 발생 30분 뒤인 10시41분쯤 최초 신고를 받고 6분 뒤 현장에 도착해 A씨에게 심폐소생술과 응급처치를 했다. 그는 인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끝내 숨졌다. DL이앤씨 측은 “사고 당시 외상이 없어 지정병원에 먼저 신고했다”며 “이후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119에도 신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는 사고 직후 작업중지를 명령한 뒤 중대재해처벌법·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 등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도 사망자가 발생한 만큼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를 지켜본 뒤 정확한 입건 범위를 조율할 계획이다.
사고 현장은 공사 금액이 50억원을 넘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다. 지난 1월 27일 시행된 이 법은 하청 노동자에 대한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원청에 부여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작업계획을 사전에 알고도 이를 묵인했다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중대재해법 시행 후 서울에서 처음 발생한 중대재해법 적용 사고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