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 상의는 피에 젖어 온통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오른쪽 가슴 편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부검확인서와 사체검안서는 모두 빛이 바래 있었다.
14일 전북대 박물관에서 찾아본 고(故) 이세종 열사의 유품은 1980년 5월18일에 있었던 참상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이날 ‘고 이세종 열사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가칭)’ 위원들과 함께 42년전 이세종 열사를 만났다. 담당자가 상자를 하나씩 열자 조용히 담겨 있던 유품들이 무겁게 인사를 건넸다.
속옷, 군용바지, 손수건, 시신을 옮길 때 썼던 면장갑…. 모두 피에 젖어 있었다. 대학 수험표와 고교 참고서, 그리고 대학 교재도 보였다. 작은 사진 속의 이 열사의 모습은 까까머리 10대 후반에 멈춰 있었다.
전북대 박물관에는 이 열사의 유품 30여점이 소장돼 있었다. 대부분 유족이 기증한 것이었다. 박물관측은 “그동안 언론 보도를 위해 두어 번 햇볕을 봤지만 나머지 시간엔 그대로 수장고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42년 전 농성장에서 같이 있었던 조혜경 전북대 민주동문회 회원은 “이 열사의 유품들을 보는 순간, 그날의 크나큰 상처가 다시 선명한 뉴스가 되어 머릿속을 지나갔다”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답답하고, 무겁고, 힘들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국 최초의 희생자다. 전북대 2학년이었던 그는 그해 5월17일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비상계엄 철폐 및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중이었다. 18일 0시부터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해 농성 학생들을 연행하던 중 건물 밖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온몸이 피투성이 상태였다.
경찰은 ‘단순 추락사’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함께 있던 학생들은 이 열사가 옥상으로 피했다가 쫒아온 군인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다 3층 건물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주검을 검안했던 이동근 전북대병원 교수는 훗날 “두개골 골절과 간장 파열 등은 추락이라는 한 가지 원인에 의해 동시에 발생할 수 없다”며 계엄군에 의한 집단폭행 의혹을 제기했다. 2002년 학술세미나에서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는 “5·18 최초의 무력 진압은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이라고 밝혔다.
그날 전북대 학생회관은 ‘5·18 비극’의 서막이자 축소판이었다. 이 열사가 현장에서 참혹하게 숨지고 농성중이던 학생 40여명이 연행됐다.
뒤늦게 이 열사는 1998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이듬해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됐다.
1985년 전북대 민주광장에 추모비가 세워졌다가 경찰에 의해 철거되는 아픔 등을 겪다가 2003년 지금의 자리를 잡았다. 추모비엔 ‘너, 민주의 들불이여. 건지벌의 영원한 넋이여…’라는 글씨와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의 모교인 전라고에도 2002년 추모비가 세워졌다. 2년 전 고인이 추락한 자리에 표지석이 설치됐다.
전북대는 최근 박물관에서 개교 75년 기념 특별전을 갖고 있는 가운데 이세종 열사의 유품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 계속된다.
이날 같이 유품을 둘러본 김완술 5·18 전북동지회 회장은 “아직도 그날의 진상 규명은 물론 이 열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며 “하루 빨리 이 열사 뿐 아니라 전북지역 민주화운동의 재조명과 기록·보존 작업이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