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페미니즘 작가 리베카 솔닛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반페미니즘 성향을 우려하는 한국 여성들을 향해 “너무 좌절하지 말고, 멈출 필요가 없다. 여성들이 이뤄온 진전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솔닛은 자신의 회고록인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창비)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15일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시 미국 여성들이 좌절감을 어떻게 이겨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자택이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화상 간담회에 나선 그는 “트럼프가 당선될 때 저도 굉장히 걱정이 많았다”면서도 “하지만 미국 전역에서 다양한 시위들이 일어났고, 새로운 운동과 조직화로 이어졌다. 이어 유색인종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가 부통령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진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여성들은 지금 상황이 힘들고 끔찍하겠지만 장기적인 그림을 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여전히 여성들을 공격하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난 5년이 아니라 지난 50년을 보면 세계는 굉장히 발전했고 여성 인권도 큰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걷기의 인문학’ 등 여러 저술을 통해 세계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부상한 솔닛은 회고록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거나 해침을 당하는 위험에 항상 노출된 사회에서 사는 것이 여성의 정신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끔찍한 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된 적은 없었지만 보통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위험과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괴롭힘과 희롱을 당했고, 이런 고통을 얘기 할 때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피해나 직접적인 피해가 아니라면 괜찮다고, 안전한 게 아니냐고 얘기한다. 하지만 직접 피해가 없었더라도 피해 가능성에 항상 노출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솔닛은 책에서 집을 떠난 19세 이후 지금까지 40여년을 돌아본다. 그는 젊었을 때 스스로를 세상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꼈다며 이를 ‘비존재(nonexistence)’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는 “비존재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조건을 아우르는 개념”이라며 “여성으로서 피해를 얘기하거나 위험을 말하면 외출하지 말아라, 총을 사라, 옷을 섹시하게 입지 말아라, 이런 충고를 들었다. 여성들에게 눈에 띄지 말라고, 존재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솔닛은 그동안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졌지만 기후변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5년간 기후변화 운동가로서도 활동해 왔다”며 “남녀 차별에 대해서 싸우는 걸 넘어서 다른 집단이 겪는 차별에 대해 함께 싸우고, 다른 종의 생존을 위해 싸울 수 있기 때문에 여성주의 운동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희망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우리가 싸워서 쟁취해야 할 게 있고, 같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세상은 우리가 포기하길 바라지만 우리는 희망을 훈련해야 된다”고 덧붙였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