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선 여전히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

입력 2022-03-14 00:05 수정 2022-03-14 01:45
지난 9일(현지시간) 오후 우크라이나 키이우 도심에서 키이우-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 소속 단원들이 헤르만 마카렌코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고 있다. 단원들은 키이우에 대한 러시아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기위해 콘서트를 마련했다. EPA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오후 1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도심에 위치한 ‘독립 광장’에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등 악기를 든 연주자 20명 정도가 모여들었다. 이들은 키이우-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 소속 단원들로 25분간 지휘자 헤르만 마카렌코의 지휘에 맞춰 우크라이나 국가(國歌),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 발췌곡 등을 연주했다. 키이우의 독립광장은 지난 2014년 부패한 친러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축출시킨 ‘유로마이단 혁명’의 중심지다.

키이우-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키이우 음악원 소속으로 2004년 창단됐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키이우-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원래 70명 안팎의 단원을 가지고 있지만 이날 콘서트에는 20여명이 모였다. 나머지 단원들은 피난을 갔거나 참전했기 때문이다. 연주용 연미복 대신 두꺼운 외투를 입은 단원들은 폭탄이나 미사일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 상황에서도 야외 연주를 했다.

오케스트라가 이날 야외 콘서트를 개최한 것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옥죄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다. 콘서트를 보려고 모인 관중은 폭탄 등의 위험 때문에 100명이 채 안됐지만, 우크라이나 국가가 연주될 때 국기를 흔드는 등 뜨겁게 호응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지휘자 헤르만 마카렌코는 로이터통신 등 언론에 “음악을 통해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가 키이우에서 콘서트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오후 우크라이나 키이우 도심에서 키이우-클래식 심포니 오케스트라 소속 단원들이 헤르만 마카렌코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고 있다. 단원들은 키이우에 대한 러시아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기위해 콘서트를 마련했다. EPA연합뉴스

참고로 키이우 음악원의 공식 명칭은 우크라이나 국립 차이콥스키 음악원이다. 제정 러시아 시절인 1863년 러시아 최초 음악학교인 러시안 뮤지컬 소사이어티 음대(1859년)의 분교로 출발했다. 당시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러시아 황제에게 키이우의 음악교육 기관 필요성을 보고한 이후 논의 끝에 만들어졌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프랑스-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차이콥스키는 어릴 때부터 우크라이나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아끼던 여동생이 결혼해서 살던 우크라이나에서 매년 몇 달씩 보내며 작곡을 하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의 작품 80개 가운데 30개가 우크라이나에서 쓰여졌을 정도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찾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이곳(우크라이나)에서 찾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키이우 음악원이 1995년 우크라이나 국립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최대 항구도시인 오데사에서도 성악가들이 바리케이드를 무대 삼아 노래하는 모습이 SNS에 잇따라 공개돼 심금을 울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도시 오데사의 랜드마크인 오데사 국립오페라극장 앞에서 합창단원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고 있다(위), 합창단원들은 시민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최근 거의 매일 바리케이드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가운데), 우크라이나 해군 군악대도 오데사 국립오페라극장 앞 모래주머니 바리케이드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 트위터·유튜브 등 캡처

오데사 국립오페라극장은 원래 3월에 베르디의 ‘아이다’ ‘일 트로바토레’, 차이콥스키의 ‘이올란타’ 등을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모두 취소됐다. 오페라극장 합창단원들은 연습 중단 이후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오페라극장 밖에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드를 쌓는가 하면 응급처치 훈련과 라이플 사용법을 배웠다. 이와 함께 합창단원들은 시민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오페라극장 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앞에서 거의 매일 노래하고 있다. 또 8일에는 우크라이나 해군 군악대가 오데사 국립오페라극장 앞 바리케이드 앞에서 팝송 ‘돈 워리 비 해피’ 등을 연주하기도 했다.

흑해에 면한 오데사는 우크라이나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이자 예술이 발달한 곳이다. 특히 오데사 국립오페라극장은 동유럽 최대 휴양도시인 오데사의 랜드마크로 꼽힌다. 1942년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오데사를 공격했을 때도 시민들은 오페라극장을 지키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쌓는 등 숱한 노력을 했다. 결국 전쟁의 포화 속에 독일이 오데사를 함락했지만 오페라극장은 살아남았다. 현재 러시아군이 오데사를 압박해 오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오데사 오페라극장이 이번에도 무사하길 기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국립오페라극장의 1942년도 모습(왼쪽)과 현재의 모습이 매우 유사하다. 80년 전에는 나치 독일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지금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모래주머니 등으로 쌓은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포스트 트위터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