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총대주교 “서방과 WCC는 선 넘지 말라고?”

입력 2022-03-13 15:56 수정 2022-03-13 16:00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최근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공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서방 때문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WCC를 향해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이안 사우카 WCC 총무대행이 지난 2일 키릴 총대주교에게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평화를 제안하고 평화의 중재자로 나서 달라는 내용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다.

답신에서 키릴 총대주교는 1950년 WCC가 발표했던 ‘토론토 성명’ 내용까지 언급하며 지나친 간섭을 경계했다. 러시아어로 쓴 서신에서 키릴 총대주교는 ‘전쟁’이라는 표현을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또한 러시아 정부와의 공감대에 따른 거로 풀이된다.

1948년 WCC가 창립한 이후 협의회의 정체성을 규정한 토론토 성명에는 “WCC의 교회론 안에 회원 교회들이 흡수되는 게 아니다. 회원 교회들의 주장이나 결의를 다른 회원 교회가 수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서신의 시작에 토론토 성명을 언급한 건 보기에 따라 사우카 WCC 총무대행의 제안에 키릴 총대주교가 선을 긋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키릴 총대주교는 “공동의 신앙과 공동의 성인을 공유하며 공동 기도로 연합하는 공동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총대주교는 “90년대까지 러시아는 안보와 존엄성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러시아를 적으로 간주하는 세력이 우리 국경 가까이 다가왔고 나토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우려를 무시한 채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들은 형제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을 서로 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무기와 전투 교관을 우크라이나에 넘치게 하려고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사는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을 러시아의 적으로 재교육하려는 시도가 가장 끔찍한 무기”라고 주장했다.

2018년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러시아에서 독립한 것도 문제 삼았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 있던 우크라이나 교회들이 독립을 원했지만,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청은 이에 난색을 표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동방정교회의 바르톨로메우스 세계총대주교의 허락 아래 독립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당시 바르톨로메우스 총대주교가 교회 분열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큰 피해를 보았다”고 밝혔다.

그는 “비극적인 갈등은 무엇보다 러시아를 약화하려는 목표로 진행되는 대규모의 지정학적 전략의 일부”라며 “심지어 서방 지도자들은 러시아를 경제 제재로 압박하며 러시아 국민에게 고통을 주며 서방에 러시아 공포증을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푸틴 대통령에게 평화를 중재해 달라는 당초의 요구에 대한 응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평화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만 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주님께서 하루빨리 영구적이고 정의로운 평화를 세우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자”며 “이 기도를 전 세계 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와 함께 나누자”고 권했다. ‘러시아의 평화’를 강조한 대목이다.

WCC에는 편견 없이 대화하자는 뜻을 전했다. 그는 “WCC가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편향성이나 일방적 접근에서 벗어나 편견 없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자”고 말했다. 결국, WCC가 말하는 평화가 한 방향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을 우회적으로 한 셈이다.

일부에서는 평화를 위한 WCC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WCC 회원교회의 한 관계자는 13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인 사우카 WCC 총무대행이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극적”이라며 “로마 가톨릭의 대응과 너무 비교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6일(현지시간) 교황청에서 자선 활동을 총괄하는 콘라드 크라예프스키 추기경과 이주·자선·정의·평화를 담당하는 마이클 체르니 추기경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했다. 교황도 “두 추기경이 ‘전쟁은 미친 행동’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모든 기독교인을 대표해 우크라이나로 떠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도 발표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