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으로 돌아온 진은숙

입력 2022-03-13 14:24 수정 2022-03-14 02:42
진은숙 작곡가가 5년 임기의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으로 한국에 돌아온다. 지난 2018년 1월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를 그만둔지 4년 만이다. (c)Priska Ketterer

지난해 10월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임기 5년의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진은숙(61) 작곡가를 선임한다고 발표했을 때 국내 음악계는 일제히 환영했다. 세계 현대음악계의 슈퍼스타인 진은숙 예술감독이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실례로 앞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이 2006~2017년 상임작곡가 겸 2016~2017년 공연자문역을 역임한 진 예술감독과 작업한 음반 ‘진은숙: 3개의 협주곡’(2014년 DG)은 국제적인 음반상을 다수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다. 또한 진 감독이 서울시향에서 예술감독을 맡아 기획한 ‘아르스 노바’의 작곡 마스터클래스에서는 김택수 신동훈 최재혁 등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작곡가들이 잇따라 나왔다. 오는 25일 개막하는 제20회 통영국제음악제를 앞두고 독일 라이프치히에 머물고 있던 진 감독과 전화 인터뷰를 11일 진행했다.

“솔직히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 제안을 받고 1년간 고민했어요. 서울시향을 그만둔 이후 작곡에만 몰두했던 시간이 정말 좋았거든요. 하지만 남편이 옆에서 ‘당신은 젊은 음악가들이 어울릴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인다’며 설득해서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어요. 무엇보다 저 스스로 한국의 젊은 음악도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진 감독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전 세계 명문 오케스트라로부터 곡을 위촉받는 스타 작곡가다. 그라베마이어상(2004년), 쇤베르크상(2005년), 시벨리우스상(2017년), 마리 호세 크라비스 음악상(2018년), 바흐 음악상(2019년), 레오니 소닝 음악상(2021년) 등 작곡가에게 주어지는 상들을 싹쓸이한 데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의 젊은 연주자들과 작곡가들에게 음악적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자택에 초대해 밥을 해먹이는 등 각별한 후배 사랑으로 유명하다. 핀란드 출신 남편 마리스 고토니(현재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예술 기획 책임)가 아내에게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직 수락을 강력히 권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진 감독은 2018년 1월 서울시향을 떠난 이후 4년 만에 다시 한국에서 공식적인 직함을 맡게 됐다.

“통영국제음악제를 맡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재능있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입니다. 작곡가와 관련해서는 지난해 가을부터 이미 통영국제음악재단 아카데미를 통해서 14명을 선발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3명의 작품이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선보이게 될 겁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아카데미는 당초 작곡가를 4명 선발할 예정이었지만 지원자가 120명 넘게 몰리자 14명을 선발했다. 진 감독은 통영국제음악제만이 아니라 자신이 상주 작곡가로 있는 해외 페스티벌과 오케스트라에 아르스 노바 때처럼 이들의 작품을 추천할 것으로 보인다. 진 감독은 또 예술감독으로서 그동안 축제 사무국과 협의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20회를 맞은 올해는 ‘다양성 속의 비전(Vision in Diversity)’이란 주제 아래 2주간 고전과 현대 레퍼토리를 아우르는 것은 물론 국악·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선보인다. 진 감독은 “오는 21일부터 접종완료 해외입국자의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정부 발표가 최근 나와서 기쁘다. 코로나19 때문에 해외 연주자 섭외가 어려웠던 것은 물론이고 자가격리 시 내한하지 못할 때 프로그램 변경도 고려해야 했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25일 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공연은 핀란드 지히자 달리아 스타솁스카(가운데) 지휘로 상주작곡가인 미국 출신 앤드루 노먼(왼쪽)의 '플레이: 레벨1'을 비롯해 상주 연주자인 노르웨이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오른쪽) 협연으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b단조 등을 선보인다.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이번 축제의 출연진은 지휘자 달리아 스타솁스카,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 작곡가 앤드루 노먼, 피아니스트 데죄 란키, 파치 앙상블, 소프라노 박혜상, 베이스 연광철,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제나, 쾰른 체임버 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 박재홍, 노부스 콰르텟 등 세계적인 거장부터 신진까지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데,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와 소리꾼 이희문 등 국악 아티스트들의 참가가 눈에 띈다. 진 감독은 “올해 주제도 그렇지만 통영국제음악제는 다양성을 추구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 기존의 클래식 음악 외에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국악도 포함되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앞으로도 매년 국악을 포함하려고 한다”면서 “최근 국악계의 독창적인 아티스트들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밝혔다.

“예술에 정치적 변수가 작용되지 않길 바란다”

2002년 윤이상음악제에서 시작한 통영국제음악제는 지난 20년간 발전을 거듭하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처음엔 봄에만 열렸으나 2006년부터 윤이상콩쿠르와 묶어서 가을 시즌도 열고 있다. 그러나, 윤이상에 대한 이념 논쟁 때문에 보수단체의 공격으로 축제 명칭을 바꾸는가 하면 박근혜 전 정권 들어 블랙리스트에 오른 윤이상평화재단과 함께 국비 지원이 끊기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해외에도 많이 알려진 축제에요. 많은 연주자가 통영을 ‘윤이상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이 발전했지만 앞으로 세계 최고의 연주자와 악단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축제로 좀 더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축제에 대한 안정적 지원과 공감대가 필요합니다. 다만 한국의 경우 예술에서 정치가 변수로 작용하는 게 유감이에요. 한국도 이제 선진국인 만큼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예술 분야는 외풍 없이 탄탄하게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진 감독은 최근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두 번째 바이올린 협주곡 ‘정적의 파편’(Scherben der Stille)을 작곡했다. 지난 1월 영국 런던 심포니에서 세계 초연돼 호평받은 이 작품은 미국 보스턴 심포니 연주로 지난 3∼5일 보스턴에서 선보인 데 이어 14일 뉴욕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또 오는 31일부터 이틀간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도 공연이 예정돼 있는데, 통영국제음악제 때문에 갈 수 없는 진 감독이 보스턴 공연 이후 라이프치히로 날아가 공연장 음향 등을 점검한 후 뉴욕으로 돌아갔다가 17일 한국에 오는 스케줄을 소화 중이다.

지난 4일 미국 보스턴에서 작곡가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정적의 파편’(Scherben der Stille)'이 안드리스 넬슨스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와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협연으로 미국 초연됐다. 진은숙이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 올라가 관객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진은숙의 오른편에 넬슨스와 카바코스가 보인다. 진은숙 페이스북

“그동안 저는 악기당 하나의 콘체르토(협주곡)만 작곡하겠다는 스스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콘체르토에 해당 악기와 관련한 저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카바코스의 음악을 깊이 들으면서 규칙을 깨게 됐습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음악가들 간의 교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두 번째 오페라는 직접 대본까지 쓰는 중”

진 감독은 또 2025년 2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초연될 예정인 두 번째 오페라를 작곡 중이다. 아인슈타인에 비견되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 천재 볼프강 파울리(1900~58)와 정신의학자 카를 융(1875~1961)의 만남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작곡은 물론 대본까지 직접 썼다. 앞서 진 감독의 첫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2007년 독일 뮌헨에서 초연된 이후 여러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됐다. 그리고 두 번째 오페라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영국 로열오페라에서 위촉받아 2018-2019시즌 공연 예정이었지만 브렉시트 등의 여파로 무기한 연기됐다.

“무기한 연기된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대해선 흥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다가 파울리에 대한 책을 읽고 새로운 오페라에 대한 흥미가 생겼어요. 파울리와 관련해 제가 직접 소설을 쓰듯 줄거리를 만든 뒤 장면을 구성했어요. 최종 리브레토에선 전문 작가의 도움을 일부 받을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제가 직접 하고 있어요.”

오페라는 작곡가와 작가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페라의 역사에서 작곡과 대본을 함께 한 작곡가는 리하르트 바그너 등 극소수다. 쉽지 않은 도전에 나선 진 감독은 “예전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오페라 대본은 처음이라 걱정도 된다. 솔직히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작업할수록 재밌다. 워낙 많은 준비를 하다보니 어떤 장면은 쉽게 쓰여지기도 했다”면서 “나 스스로도 이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