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가격 상승은 누구 탓…바이든·푸틴 책임론 공방

입력 2022-03-13 08:04

요즘 미국 주유소 직원들에겐 잡일이 하나 생겼다. 주유기 가격표 옆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내가 해냈다”고 말하는 모습이 담긴 ‘바이든 스티커’를 떼어 내는 일이다. 휘발유 가격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자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일부 소비자들이 표현한 것이다. 바이든 스티커 판매가 최근 급증했다는 업주, 하루 4~5번 정도는 이런 스티커를 떼어 내고 있다는 주유소 직원 등의 인터뷰도 보도되고 있다.

이는 최근 미국에서 진행 중인 가격 인상 책임론 공방의 단면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휘발유 가격 인상의 책임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돌리려 노력 중이다. 반면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이 ‘친환경 의제’로 에너지 기업들의 발목을 잡은 결과라고 비난하고 있다.
‘푸틴 책임’ vs ‘바이든 책임’

가격 인상 책임론 공방은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산 석유 수입 금지를 발표하며 “이번 조치는 푸틴에게 상처를 줄 것이지만, 미국에서도 비용이 발생한다. 푸틴의 가격 인상”이라고 규정한 뒤 불이 붙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곧 푸틴 책임론을 반복하며 가세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언급하며 “이건 도덕적인 이슈다. 아무도 러시아의 전쟁에 연료를 공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가격 인상이 러시아의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치러야 할 도덕적 대가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당파적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백악관이 민주당에 ‘푸틴의 가격 인상’을 반복적으로 언급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 전략을 배포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도 “백악관이 푸틴 대통령을 물가 인상에 묶어두려는 메시지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화당은 바이든 책임론을 언급하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공화당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금지 조치는 적극 찬성하지만, 휘발유 가격 인상은 친환경 정책을 과도하게 추진한 바이든 행정부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불행히도 지난 1년 동안 민주당은 휘발유 가격에 큰 피해를 주는 무분별한 정책으로 미국의 에너지 잠재력을 약화했다”며 “푸틴 대통령이 아니라 바이든 대통령의 가격”이라고 공격했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도 “트럼프 행정부 4년 동안 우리는 처음으로 에너지 자립을 달성했다. 미국은 에너지 순 수출국이었다”며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키스톤 XL 파이프라인’을 죽이고, 국내 석유 시추를 제한하고, 화석연료 기업에 보조금 지급을 중단해 가격을 높였다”고 지적했다. 키스톤 XL 파이프라인은 미국과 캐나다의 원유 수송관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기후변화 대응 등 친환경 정책을 강조하며 취임 첫날 프로젝트 허가를 취소했다.

보수 성향의 인터넷라디오 진행자인 휴 휴이트는 워싱턴포스트(WP) 칼럼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서방이 러시아에 가한 올바르고 적절한 제재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며 “그러나 푸틴의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가기 전 인플레이션 수치를 우리는 알고 있다. 미국인은 바보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러시아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 대처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공영라디오 NPR 여론조사에서 47%, 지난주 폴리티코 조사에서 45%의 지지를 얻었다. 각각 이전 조사 때보다 8% 포인트, 4% 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가디언은 “다른 서방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힘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여론은 다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산 석유 수입 금지 조치에 대해 응답자 79%가 찬성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더라도 해당 조치를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 63%는 바이든 대통령의 물가 인상 대처 방식에 부정적인 평가를 보냈다. 응답자 50%는 바이든 행정부가 해결하기 원하는 가장 큰 문제로 인플레이션과 경제를 꼽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25%에 그쳤다. 인플레이션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정당을 묻는 조사에서 유권자 47%는 공화당을 선택했고, 민주당을 선택한 유권자는 30%였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부에서도 인플레이션 대처를 서두르지 않으면 지금의 지지율 상승이 일시적 효과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진보 계열 싱크탱크 ‘데이터 포 프로그레스’ 숀 매켈위 대표는 “민주당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나타나는 결집 효과 덕을 보고 있지만, 제재의 경제적 현실은 향후 몇 달간 지속할 것”이라며 “에너지 비용을 줄이는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효과는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플레이션 수치는 더 악화하고 있다. 미 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12일(현지시각) 현재 휘발유 1갤런당 평균 가격은 4.326 달러로 1주일 전(3.922 달러)보다 40센트가 올랐다.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7.9%로 1982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세를 기록했다. 3개월 연속 7%대 상승이다. 이번 조사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분이 반영되지 않아 다음 달 인플레이션 수치가 더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오는 15∼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금리 인상을 논의한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연준이 현재 0∼0.25%인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올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