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매장된 시신, 피흘린 임산부…러 “불가피한 공격”

입력 2022-03-10 20:32 수정 2022-03-10 22:02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외곽에서 9일(현지시간) 영안실 직원들이 검은색 비닐로 싸인 관에 희생자 시신을 안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러시아의 폭격이 계속되며 우려했던 민간인 피해가 커지고 있다. 시가전과 도시봉쇄 상황이 길어지며 발생한 비극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결사항전과 서방국가의 경제 제재로 침공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초조해진 러시아가 점점 더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폭격은 해산일이 임박한 배가 부푼 임산부에게도 향했다. 동부 주요 교전 지역인 마리우폴의 산부인과는 러시아군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였다.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민간인에 대한 야만적인 공격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러시아는 군사적 시설만 공격했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한 임산부가 들것에 실려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마리우폴 폭격 세례에 산부인과도 파괴

미국 CNN 방송은 우크라이나 침공 2주째인 9일(현지시간)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는 임산부의 사진을 보도했다. 러시아군은 이날 마리우폴에 십자포화를 퍼부었고 이 과정에서 도시의 한 산부인과에도 폭격이 향했다.

마리우폴 시의회는 이 폭격으로 출산을 앞둔 임신부와 병원 직원 등 17명이 다치고 최소 3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사망자 중엔 어린 여자 어린이도 포함됐다. 러시아군은 민간인이 ‘인도주의 통로’를 통해 대피할 수 있도록 이날 오전 9시부터 12시간 동안 마리우폴을 포함한 주요 도시에서 일시적인 휴전을 약속했다. 이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시의회는 포탄에 맞아 파괴된 산부인과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다. 공개된 영상에는 병원 안에 만삭의 임산부와 의료진의 모습이 포착됐다. 공중에서 투척 된 여러 발의 폭탄으로 최근까지 아이들이 치료를 받았던 병동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다.

사진에는 포격에 부서진 병동의 피 묻은 침대 사이로 집기를 옮기는 의료진, 들것에 실려 대피하는 임산부의 모습이 담겼다. 현지 경찰 책임자 볼로디미르 니쿨린은 “러시아는 오늘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 이건 변명의 여지 없는 전쟁 범죄”라고 성토했다.

실제로 마리우폴 주민 마리나 레빈추크는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손발을 묶은 채 밖에 시신을 덮어두라는 지침을 시 당국이 내리고 있다”고 증언하며 현지의 비극적인 상황을 전했다. 그는 러시아군의 포위 전 가까스로 도시를 빠져나왔다고 설명했다. NYT는 공동묘지에 러시아군 공격으로 숨진 민간인들이 집단 매장되고 있다고도 보도했다.

세르힐 수코믈린 키이우(키예프) 시장은 서쪽 도시 지토미르에서도 러시아군이 병원 2곳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다행히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날 러시아가 지난 2주간 우크라이나의 병원 등 의료시설 18곳을 공격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병원과 구급차에 대한 공격으로 최소 10명의 민간인이 숨졌다고도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산부인과 병원을 직격했다. 어린이들과 주민들이 잔해 아래 갇혀있다”며 “잔악 이상의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세르히 오를로프 마리우폴 부시장도 러시아 침공 이후 이날까지 최소 1170명의 민간인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9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외곽에서 인부들이 포격에 희생된 주민들의 시신을 집단매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국제사회 맹비난, 러시아는 “사실 아니야”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러시아의 무차별 폭격이 계속되자 국제사회가 비판 행렬에 합류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끔찍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면서 “민간인들이 그들과 무관한 전쟁에서 가장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폭력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연약하고 방어력이 없는 사람들을 겨냥하는 것보다 더 불량스러운 것은 없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끔찍한 범죄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도 “비양심적인 공격”이라고 지적했다.

인도주의 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MSF)는 “마리우폴에서 포격과 폭격이 계속 이어지면서, 특히 활동에 제약을 받는 임산부와 노인들이 의료서비스를 받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려했다.

비판이 쏟아지자 러시아 외교부는 이 병원 내부에 우크라이나군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불가피한 공격이었다고 맞서고 있다.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의 특수군사작전에서는 정밀폭탄을 사용하고 있고, 군사적 목표물만 타격하고 있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러시아군은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분리주의 반군 지역과 2014년 러시아가 강제병합한 크림반도를 이어줄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 낙점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따르면 러시아의 포위 공격이 9일째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이곳에서만 1200명이 사망했다.

포격 세례에 주민들이 탈출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전기와 수도, 가스가 수일 째 끊긴 데다 식료품과 의약품까지 고갈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 주민들 다수가 생사기로에 몰리며 국제사회의 우려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