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대상 지목된 여가부…위기감 엄습한 여성계

입력 2022-03-10 17:30 수정 2022-03-10 17:30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부처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정부서울청사 17층 여성가족부 복도로 10일 직원들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다들 숙연하게 본인 일을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20대 대통령 당선인이 결정된 10일 한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업무가 소중하고, 당연히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선 기간 동안 여가부를 폐지 대상으로 거듭 지목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이날 대통령에 당선되자 여가부와 여성단체 인사들은 참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여성계는 대선 기간 내내 반여성주의적 행보를 선거 전략으로 내세운 윤 후보의 당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이 모인 한 텔레그램 메신저 채팅방에서도 울적한 기운이 흘렀다. 한 여성단체 대표는 “전체적으로 침울하다. 다들 말씀이 없으시다”고 했다. 그는 “활동가들을 포함해 많은 여성, 특히 20~30대 여성들에게 이번 대선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 자체가 이미 대단히 모욕적이었다”고 말했다.

윤 당선인은 대선 운동 과정에서 반여성주의적 행보를 보인다는 비판을 여성계로부터 받아왔다. 지난해 8월에는 “페미니즘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이 돼서 남녀 간 건전한 교제 같은 것도 정서적으로 막는 역할을 많이 한다는 얘기도 있다”고 언급했다. 여가부를 향해서는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홍보 등으로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며 부처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여가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신설된 이래 호주제 폐지, 정부 공무원 여성 비율 확대 등의 업적을 남겼다. 여러 정부를 거치며 업무 범위나 위상에 부침은 있었지만 정부 정책에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하는 역할을 해왔다.

여가부 폐지가 대선 공약으로 걸린 건 처음이 아니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 여가부 폐지를 공약으로 걸었다가 당선 뒤 철회했다. 다만 윤 당선인이 여가부 폐지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운 지금은 당시와 분위기가 다르다. 한 여가부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 당선) 당시만 해도 젠더갈등이 핵심 이슈는 아니었다. 다들 성평등은 당연히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라고 했다.

윤 당선인은 여성의 날이던 지난 8일 ‘성범죄 처벌 강화, 무고죄 처벌 강화’, ‘여성가족부 폐지’, ‘여성이 안전한 대한민국, 성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소셜미디어 계정에 재차 내걸었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윤 후보 캠프가) 노골적으로 반여성주의 세력의 요구를 정치화시키는 걸 전략 삼은 게 선명히 보였다”고 비판했다. 다른 단체 관계자는 “소위 ‘이대남(20대 남성)’을 중심으로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라면서 “실체 있는 정치적 세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보다 무책임하게 차별과 혐오를 조장시키는 저열한 정치”라고 했다.

다른 여성단체 관계자는 “주변에 윤 후보 당선이 두려워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찍는 걸 고민하는 20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정말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선거 출구조사 결과에서 20대 이하 여성은 58%가, 30대 여성은 49.7%가 이 후보를 찍었다고 답했다. 윤 후보를 찍은 20대 여성이 33.8%, 30대 여성이 43.8%였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했다.

다만 이 후보를 포함한 민주당 역시 신뢰할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 여성계 관계자는 “민주당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 때 행보에 신뢰를 잃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를 대안으로 택한 이들도 많지만 당내 여력 등 아쉬운 게 있다”면서 “20~30대 여성으로서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될 공간이 충분치 않았다. 노골적으로 무시됐다는 느낌이 컸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여성계뿐 아니라 많은 2030 여성들이 정서적으로 ‘대선 후유증’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우리 단체 동료나 주변인도 그렇지만 상담센터 심리상담가 분들로부터 대선 때문에 우울감을 호소한 20대 여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했다.

한 여성 활동가는 “윤 당선자가 반여성주의 기조가 명확하긴 했지만 성폭력을 제대로 처벌하겠다고 했다”며 “했던 말대로라면 성범죄 피해자를 더 잘 지원하고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받게 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과연 윤 당선인이 문화적으로 인권감수성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며 (정책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반영할 수 있을 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