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각종 의혹으로 구설에 올랐던 윤석열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도 끝내 등판하지 않았다.
미혼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배우자가 공식 행보를 함께하지 않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윤 당선인과 12살 나이 차이가 나는 김 여사는 2019년 7월 청와대에서 열린 윤 당선인의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에서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세련된 외모와 왕성한 사회활동 이력이 함께 조명받으며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이 자리가 두 사람이 나란히 사진에 담긴 처음이자 마지막 자리였다.
1972년생으로 올해 50세인 김 여사는 해외 유명 미술품 전시·기획사인 코바나콘텐츠 대표를 맡고 있다. 정치권의 통상적인 ‘내조형 아내’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윤 당선인이 지난해 6월 정치 도전을 선언하면서 주요 국면마다 김 여사의 데뷔전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윤 당선인은 평소 스스로를 ‘애처가’라고 소개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아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온 데다 ‘커리어우먼’ 이미지와 맞물려 많은 사람이 김 여사의 적극적인 행보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김 여사의 등판은 끝내 불발됐다. 초반은 김 여사 본인과 친정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을 둘러싼 사법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게 영향을 미쳤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 모친의 요양급여 부정수급 의혹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허위 이력, 무속 논란 등 개인 신상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등판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김 여사는 지난해 12월 26일 여의도 당사를 찾아 이력 논란에 대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한 이후 비공개 일정 위주로 움직였다. 그사이 이른바 ‘7시간 통화’ 녹취 파문으로 한 차례 더 곤욕을 치렀다. 지난 1월 17일 MBC 스트레이트 보도를 통해 공개된 녹취록은 김 여사가 유튜브 채널 ‘서울의 소리’ 관계자와 사적으로 대화한 내용이 담겼다. 특히 무속, 주술 관련 발언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피해자에 대한 언급 등이 논란이 됐다.
선거에 악재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당초 우려와 다르게 시간이 흐르면서 지지층 사이에서는 오히려 김 여사 특유의 털털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효과도 있었다는 게 국민의힘 선대위의 판단이다. SNS 등에서는 팬클럽도 생겨났다.
김 여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필 사진 촬영을 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개인 프로필 페이지도 개설했지만 공개활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지난달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를 만나고 서울 강남구 소재 봉은사를 다녀간 모습이 사후에 사진 보도 등으로 공개됐지만 이 또한 개인 차원의 일정이었다고 당선인 측은 설명했다.
‘개 사과’ ‘화난 귤’ 등 윤 당선인의 SNS에 게시된 이미지가 논란이 될 때마다 김 여사가 계정을 관리하고 있다는 여권발 공세가 이어졌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4일 서초구 자택 인근 사전투표장이었다. 홀로 투표를 마친 김 여사는 소감을 묻는 취재진을 향해 “고생 많으십니다”라고 짧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김 여사가 이토록 공개 언행에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인 것 자체가 이번 선거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내조’라는 해석도 당 일각에서 나왔다. 여야 모두 내외의 신상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던 상황에서 배우자들이 가십 거리로 소비될 경우 후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부각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만큼 대내외적으로 다양한 공개활동이 요구되는 영부인으로서 역할을 김 여사가 어떻게 해낼지 관심이 쏠린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곁을 지키며 ‘그림자 내조’를 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김 여사 본인의 전문성과 활동성을 살린 행보로 새로운 영부인상을 정립하리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교육자로서 본인의 커리어를 이어가며 ‘투잡’을 수행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 사례가 롤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김 여사는 역대 대선 후보 배우자 가운데 개인 팬클럽을 보유한 유일한 사례로도 기록을 남겼다. 팬카페 ‘건사랑’은 투표일 기준 회원수가 8만명에 육박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