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산불 난리인데… 소방청 ‘물뿌리기’ 전시행정

입력 2022-03-08 18:17

동해안 산불이 거세게 번지던 지난 5일 소방청은 개청 이래 처음으로 ‘예비 주수(물 뿌리기)’를 전국 단위로 지시했다. 산불 예방을 위한 조치였지만, 산림 인접 여부 등 지역 특성과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지시가 내려가면서 ‘공원에 물을 뿌렸다’는 등의 내부 증언까지 나오고 있다.

8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소방청은 지난 5일 전국 화재위험경보 심각 단계를 발령하면서 전체 소방서에 ‘산림 및 인접마을에 대한 예비주수를 실시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강풍주의보, 건조주의보 등 기상특보가 발효된 지역 소방서는 산림 인접 민가와 문화재, 주요시설물 등에 하루 2회 ‘주수’를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2017년 소방청이 생긴 이래 전국 단위로 주수 지시가 내려진 건 처음이다.

상부의 지침이 떨어지자 일부 지역 소방서는 주수 실적과 함께 활동사진을 매일 오후 제출하라고 공지했다. 불이 옮겨 붙을 수 있는 가옥이나 문화재 지붕, 낙엽이 쌓인 곳 등에 미리 물을 뿌려 불이 나더라도 대형 화재로 번지는 것은 차단하라는 취지다.

소방청 관계자는 “5일 강원도 삼척 고포마을에서도 산불이 번지다 예비 주수 덕에 40여채 가옥 중 36채가 온전히 보존되는 등 효과가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지역성 특성이나 인력 상황 등에 대한 고려없이 물 뿌리기 지시가 내려졌다는 점이다. 산림과 인접하지 않은 도심 지역 소방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력난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보고를 위한 예비 주수 작업이 적절하냐는 내부 불만이 나온 이유다. 현장에서는 소방관 감염으로 1개 팀 전체가 격리되는 소방서가 나오고 있는데다 동해안 산불 진화를 위한 총 동원령까지 내려진 상태라 지역 화재 사고를 감당하기도 버겁다고 토로한다.

현직 소방관만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는 ‘2곳을 정해 물을 뿌리라는데 관내 산이 없어서 공원에 물을 뿌리고 왔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차라리 기우제를 지내는 게 낫겠다’ ‘소방청은 문서로 불을 끈다’는 식의 자조도 나왔다.

경기도 한 소방관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오늘도 보고용 사진 찍으러 나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소방서 관계자는 “코로나 때문에 다른 팀에서 한두명씩 인원을 빌려 막는 식으로 겨우 3교대를 유지하고 있다”며 “예비 주수는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정은애 소방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예비 주수의 효과를 높이려면 대원들이 현장에서 상주하며 물을 뿌려야 한다”며 “예방 활동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난 2년간 코로나19 비상체제로 인력이 운영되다 보니 현장에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전국에 화재위험경보 심각 단계가 발령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각 현장에 대한 세밀한 지침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노출된 문제들을 참고해서 향후 구체적으로 어떤 시설물, 어떤 장소를 대상으로 예비 주수를 진행할지 지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형민 이의재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