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고 일반 무역을 제재하는 내용의 법안 처리에 합의했다. 미 의회는 관련 법안 성안 작업에 나섰고, 이르면 이번 주 처리할 전망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그러나 의회의 제재 움직임에 적극적인 반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수입 금지가 인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하면 지지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 등 대러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이 신중론을 언급하면서 제재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대러 제재에 유약한 모습을 보이면 리더십이 흔들릴 수 있어 곤란한 처지가 됐다.
하원 조세 무역위원장인 리처드 닐(민주), 상원 금융위원장인 론 와이든(민주) 의원과 공화당 케빈 브레이디 하원의원과 마이크 크레이포 상원의원은 7일(현지시간) 공동성명을 내고 “러시아 에너지 제품 수입을 금지하고, 러시아 및 벨라루스와 무역 관계를 중단하는 내용을 합의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전쟁은 용납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합의에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러시아와 벨라루스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 권한을 부여하고, 미 상무부 장관에게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참여 중지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로이터통신은 미 하원이 이르면 8일 러시아 에너지의 수입을 금지하고 러시아와 일반 무역을 중지하는 내용의 관련 법안을 처리할 예정이라고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보도했다.
반면 미 상무부는 이와 관련 “푸틴의 정당한 이유 없는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효과적이고 단호한 전 세계의 대응을 진전시키기 위한 대책을 놓고 의회와 논의 중”이라고만 설명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도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언급했다.
전문가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태도가 러시아 에너지 수입 제재 도입 파장에 대한 걱정 때문으로 분석했다.
WP는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 석유 수입 금지 계획을 마지못해 진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명하다. 공화당은 이 조치를 큰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여파에 대해서는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의 에너지 제재 가능성이 알려지자 휘발유 가격은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고, 에너지 위기 공포로 글로벌 주식시장도 내림세에 있다.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 담당 부총리는 “(에너지 제재 시) 유가 폭등이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배럴당 300달러 이상도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유럽 동맹의 이견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날 성명에서 “유럽은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을 일부러 제재 대상에서 제외해왔다”며 “유럽에 난방, 이동, 전력, 산업을 위한 에너지 공급은 현재로서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보장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것(러시아산 에너지)은 공공 서비스 제공과 우리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했다.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도 영국, 캐나다와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즉시 중단하라고 강요하면 유럽 등 세계의 공급망을 망가뜨리고 결국 우크라이나에도 영향을 주는 등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는 것도 압박이다. 여론조사기관 해리스X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중간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는데, 응답자 36% 공화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컸다고 뉴스위크가 보도했다. 민주당에 투표할 의향은 24%에 그쳤다.
드리탄 네쇼 해리스X 대표는 “경제 제재 시행이 느려 유권자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푸틴에 약하다고 믿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위기가 장기화하면 유권자들은 민주당의 미지근한 행동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독자 제재 카드를 검토 중인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 “바이든 행정부가 적어도 초기에는 유럽 동맹의 참여 없이 독자적으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미국의 수입 원유 중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3%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에너지 전문가 니코스 차포스는 “(미국 독자 제재는) 솔직히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