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을 가던 우크라이나 일가족 4명이 러시아의 포격에 희생됐다. 어머니와 10대인 아들, 8살쯤 돼 보이는 딸은 숨졌고, 그나마 생명의 줄을 놓지 않고 있던 아버지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더타임스 일요판 선데이타임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외곽 소도시 이르핀의 도로에 러시아군이 발사한 박격포탄이 터져 피란길에 나섰던 일가족이 변을 당했다.
북쪽에서 침입한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향해 남하를 계속하면서 이르핀과 호스토멜, 부차 등 키이우 서북쪽 소도시 주민들도 키이우를 향한 피란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다리를 폭파한 상황이라 이동하기가 녹록지 않다. 파괴된 다리 잔해 사이로 어떻게든 강을 건널 수는 있지만 다리에 접근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도로는 사방이 노출돼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러시아군의 포격을 피할 방법이 없다.
사고를 당한 일가족은 다른 피란민과 무리를 이뤄 도로를 달렸으나 포탄이 이들을 겨냥하기라도 한 듯 날아와 터졌다. 길에 쓰러진 일가족을 향해 우크라이나 군인과 자원봉사자들이 도우려고 달려갔으나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반려견 운반용 케이지 속에서는 영문을 모르는 강아지가 처량하게 짖어대고 있었다.
이들 가족의 비극과 이르핀을 비롯한 키이우 북쪽 외곽지역 주민들의 목숨을 건 피란길은 현지 취재진과 주민들이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이 각국 언론 매체와 SNS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부서진 다리 밑에 수백명의 피란민이 모여든 장면이 담긴 AP통신의 사진은 많은 유력 매체에 보도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진에서 피란민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짐가방을 들거나 반려동물을 안은 채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집결해 있다.
키이우를 향한 러시아군의 공세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키이우 북쪽지역 주민들의 목숨을 건 탈출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이들 가족이 겪은 것과 같은 불행이 되풀이될 우려가 크다. 그러나 이르핀 주민들은 러시아군이 진격해 오는 상황에서는 집에 있는 것보다는 피란길이 더 안전하다고 여긴다고 선데이타임스는 전했다.
키이우 방위사령관인 올렉시 쿨레바는 이르핀이 사실상 포위됐다면서 키이우로 향하는 길이 너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휴전이 없으면 우리는 주민들을 대피시킬 수 없다. 침략자들이 주민 대피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민간인을 향한 러시아의 공격이 “야만적”이라고 비난했고,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이러한 행위가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