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문신’ 폴루닌·‘푸틴 지지’ 자하로바, 발레계의 ‘뜨거운 감자’

입력 2022-03-07 00:10 수정 2022-03-07 08:32
가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문신을 새긴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왼쪽).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는 모습. 두 슈퍼스타 무용수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면서도 푸틴 대통령을 지지해왔다. 세르게이 폴루닌 인스타그램·러시아 크렘린궁 보도자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해온 러시아 예술가들이 국제무대에서 퇴출당하고 있다. 클래식계에서 ‘푸틴의 친구’로 유명했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대표적이다. 발레계에서는 친(親)푸틴 무용수인 세르게이 폴루닌(32)과 스베틀라나 자하로바(42)가 최근 여론의 타깃이 되고 있다. 발레계 슈퍼스타인 두 무용수는 구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현재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댄서’로 잘 알려진 폴루닌은 영국 로열발레학교를 거쳐 2009년 영국 로열 발레단에 퍼스트 솔리스트로 입단했다. 이듬해 19살에 발레단 역사상 최연소 수석 무용수가 되는 파란을 일으킨 그는 뛰어난 재능과 잘생긴 외모 등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발레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며 2012년 퇴단해 충격을 줬다. 몇 달 뒤 다시 무대에 돌아온 그는 발레보다는 뮤지컬, 댄스 비디오,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거나 여러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에 치중해 왔다.

‘자기 파괴적인 무용수’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듯 그는 공연을 펑크내거나 약물을 흡입하는 등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지난 2018년 11월 인스타그램에 푸틴의 얼굴을 문신한 가슴 사진을 올리며 러시아 국적 취득 소식을 전해 충격을 줬다.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면서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에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부도덕하다”고 비판하면서 “나는 어릴 때 그(푸틴)의 안에서 빛을 보았다. 그를 존경한다”고 푸틴을 옹호했다. 그리고 2019년 1월엔 인스타그램에 동성애 혐오와 성차별 발언을 해서 2월에 예정되었던 파리오페라발레의 ‘백조의 호수’ 객원 주역이 취소되기도 했다.

세르게이 폴루닌의 신작 '라스푸틴'의 한 장면. 제정 러시아를 망하게 만든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그린 드라마 발레다. 세르게이 폴루닌 페이스북

자하로바는 시대를 대표하는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프리마 발레리나 아졸루타’의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발레리나다.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발레학교를 6년 다닌 후 그는 16살 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바가노바 국제 콩쿠르에 참가해 2위를 차지한 뒤 바가노바 아카데미로 옮겼다. 1996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18살 때인 이듬해 수석 무용수로 발탁됐다.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7년을 보낸 후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의 제안으로 이적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과의 결혼 및 딸 출산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간판스타로 활약하고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국제무대에서 객원 무용수로 각광받는 한편 2005년 브누아 드 라 당스상, 2008년 러시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는 2011~2019년 러시아 두마(연방의회 하원)를 두 차례 역임할 만큼 푸틴 지지자로 유명하다. 푸틴도 그의 생일에 선물과 꽃을 보낼 정도다. 그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침공 및 합병 당시 지지한 예술가 리스트에 사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해 겨울 자신의 모교인 키이우 발레학교를 지원하려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두 스타 무용수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자하로바는 인스타그램 등 SNS에 자신을 비판하거나 입장을 밝히라는 댓글이 넘쳐나자 아예 비공개로 돌려놓았다. 공교롭게도 두 무용수는 4월 9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나란히 공연이 예정돼 있다. 폴루닌은 9~10일 아르침볼디 극장에서 제정 러시아를 망하게 한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소재로 한 ‘라스푸틴’을 선보일 계획이며, 자하로바는 9일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리는 발레리나 카를라 프라치 타계 1주기 갈라 공연에 출연하는 일정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두 스타 무용수가 공연을 앞두고 입장 발표가 필요하다는 측과 지나치다는 측으로 여론이 나뉜 모양새다. 앞서 밀라노 시장이자 라 스칼라 극장 이사회 멤버인 주세페 살라 시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게르기예프가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한 바 있다. 그리고 침묵한 게르기예프는 결국 3월 지휘 예정이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하차했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지난 2018년 한국 유니버설 발레단의 '라바야데르'에 출연했을 때의 모습. 유니버설 발레단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러시아 언론인 예브게니 웃킨은 밀라노 소재 일간지 일 조르노에 “예술가에 정치적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것은 1930년대 독일(나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게르기예프의 사례는) 위험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반면 이탈리아 볼로냐 코뮤날레 극장 음악감독인 우크라이나 지휘자 옥사나 린은 비디오 성명을 통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실체를 드러낸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현재까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침묵하는 예술가는 양심과 인류애를 저버린다는 의견이 많아 보인다. 다만 모든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동안 푸틴 정권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거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확실히 물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인 디아나 비쉬네바,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 아르템 아브차렌코 등이 적지 않은 불이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반전 입장을 표명한 것을 고려할 때 그동안 푸틴 지지자로 유명했던 폴루닌과 자하로바는 이번 이탈리아 공연을 앞두고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다. 폴루닌과 자하로바가 예정대로 밀라노에 와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힐지 관심이 집중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