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이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스페인과 영국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앞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미국 투어공연에서 ‘친푸틴’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를 대신해 협연자로 나서는 기회를 잡은 것과 반대다.
김기민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상트페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의 간판스타 가운데 한 명이다. 순혈주의가 강한 러시아 발레계에서 한국 출신으로 수석무용수가 된 그에게는 세계 각국에서 갈라 공연이나 게스트 출연 요청이 쏟아진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김기민을 비롯해 러시아 무용수들과 러시아 발레단들이 공연 취소 등 타격을 받고 있다.
김기민은 원래 지난 4일부터 3일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발레단의 ‘돈키호테’에 남자 주인공 바질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마리우스 프티파 원작을 발레단 예술감독 엘리아스 가르시아와 게스트 안무가 라리사 레즈니나가 공동 재안무한 ‘돈키호테’에서 김기민은 2일 도착해 키트리 역의 발레단 수석무용수 레베카 스토라니와 호흡을 맞추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유럽연합(EU) 등 서방 36개국과 러시아가 각각 상대방 항공기의 역내 운항을 금지하면서 김기민도 러시아 밖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이에 따라 카탈루냐 발레단과 김기민은 러시아의 운항을 제재하지 않은 터키나 아랍에미리트를 경유하는 방식 등도 고려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김기민은 오는 13일 영국 런던 콜리세움 극장에서 예정됐던 ‘발레 아이콘 갈라 2022’에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주최하는 영국 앙상블 프로덕션과 콜리세움 극장은 지난 1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를 위해 이번 공연을 취소했다.
2006년부터 매년 3월 런던에서 열리는 발레 아이콘 갈라는 당대 최고의 무용수들을 초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러시아의 발레 스타들을 초청하는 ‘러시아 발레 아이콘 갈라’로 시작했다가 2016년부터 전 세계 유명 발레단의 간판스타들을 초청하는 형태로 확대됐다. 올해는 현대 발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발레 뤼스’ 창시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로 구성됐으며 김기민 등 발레 스타 28명을 초청했었다. 이들 무용수 가운데 마린스키 발레단 4명, 볼쇼이 발레단 5명 등 러시아 측 참가자가 9명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영국 투어를 진행하던 러시아 시베리아 국립발레단이 공연을 중단하는가 하면 런던 로열오페라극장이 올여름 예정됐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취소하는 등 발레 아이콘 갈라를 둘러싼 분위기가 악화됐다. 여기에 EU의 러시아 항공기 운항 금지에 이어 지난달 28일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고려해 이번 갈라에 무용수들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취소가 확정됐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문제로 국제무대 활약 기회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김기민도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카탈루냐 발레단이 지난 1일이 현지 언론에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김기민은 “춤은 몸으로 말하는 또 다른 언어다. 내게는 그것이 예술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많은 정치적인 문제가 있고 전쟁과 전염병이 있어도 예술, 특히 발레가 평화가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정치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저 춤을 추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빈필의 미국 투어공연 협연이 향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된다.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이 급하게 대타로 결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성진의 연주가 능숙하고 섬세했다는 호평을 내놨기 때문이다.
빈필은 지난달 25~27일 뉴욕 카네기홀과 3월 1~2일 플로리다주 아티스-네이플스에서 ‘푸틴의 친구’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로 공연이 예정됐었다. 각각 첫날 공연엔 협연자로 마추예프가 나서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악화한 미국 여론을 의식한 카네기홀과 빈필은 게르기예프를 대신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 야닉 네제 세겡에게 지휘를 맡기는 한편 협연자로 조성진을 내세웠다. 아티스-네이플스의 공연은 첫날 네제 세겡과 조성진이 나서고 둘째날은 또 다른 지휘자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맡았다.
뉴욕타임스는 조성진의 긴박했던 출연 과정을 소개했는데, 조성진은 베를린 시간으로 25일 자정에 연락을 받았고 7시간 비행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당시 네제 세겡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돈 카를로’ 리허설 때문에 빈필, 조성진과 리허설을 할 시간이 겨우 75분에 불과했다. 게다가 조성진의 경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는 2019년이 마지막이었다. 겨우 하루 전에 연락받았지만 조성진은 빈필과의 첫 협연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물론 조성진의 터치가 오케스트라와 비교해 가볍다는 지적이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 암보로 연주하며 섬세하게 친 것은 칭찬받을 만하다는 게 중론이다. 뉴욕타임스의 경우 오히려 원래 예정했던 무대보다 더 나았을 수 있다고까지 썼다. 평소 기복이 있는 게르기예프가 우크라이나 사태로 더욱 불안정해졌을 수 있으며 마추예프는 라흐마니노프 연주에서 과도하게 질주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조성진은 공연을 마친 후 자신의 트위터에 “카네기홀에서 열린 빈필 공연 막판에 투입돼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과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조성진은 지난 2일 캐나다 토론토를 시작으로 4월 9일까지 독주회(6회), 뉴욕 필하모닉과 신시내티 심포니 등 오케스트라 협연(5회),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의 듀오(2회)에 나섰다. 이번 빈필 협연 대타가 워낙 클래식계 내에서 큰 화제가 됐던 만큼 조성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게 분명하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