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안전 확보한 것뿐”…우크라 “가스라이팅 그만”

입력 2022-03-05 11:22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단지를 겨냥한 러시아군의 포격을 두고 직접 당사자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설전을 벌였다. 러시아 측이 핵 도발을 막고 원전의 안전을 확보한 것뿐이라는 취지로 해명하자 우크라이나 측은 “가스라이팅”이라며 정면 반박했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들은 러시아의 공습을 규탄하며 병력 철수를 촉구했다.

4일(현지시간) 안보리에서 발언하는 바실리 네벤쟈 주유엔 러시아 대사. EPA연합뉴스

러시아 “원전 포격, 사실 아니다”

바실리 네벤쟈 주유엔 러시아대사는 4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원전 공격과 관련해 열린 안보리 회의에서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자포리자 원전 단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우크라이나 측의 발표를 ‘거짓말’로 규정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원전을 공격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명백한 거짓”이라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국수주의자나 테러단체가 현 상황을 이용해 핵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원전을 통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 국방부의 발표를 인용해 “러시아군이 원전 단지 인근에서 순찰 중 우크라이나의 사보타주(의도적 파괴행위) 그룹의 공격을 받아 응사했을 뿐”이라며 “이 그룹이 단지 밖에 있는 교육용 건물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벤쟈 대사는 “원전과 주변 지역은 러시아군이 지키는 중”이라며 “원전이 있는 지역의 자연방사선은 정상 수준이며 원전 안전과 방사성 물질 유출에 대한 위험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원전과 우크라이나의 전반적인 안전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4일(현지시간) 안보리에 참석한 세르게이 끼슬리쨔 주유엔 우크라이나대사.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 “거짓 퍼뜨리지 말라”

이후 발언권을 얻은 세르게이 끼슬리쨔 주유엔 우크라이나 대사는 상기된 얼굴로 러시아를 향해 “거짓을 퍼뜨리는 일을 그만 멈추라”고 성토했다.

끼슬리쨔 대사는 “자포리자 원전 상황에 관한 러시아 측의 설명은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하고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의 끔찍한 사례”라며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현재 원전 주변 지역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수천 명이 진행 중인 포격과 전투 때문에 대피하지 못하고 이번 사태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전날 러시아의 자포리자 공격을 재차 언급하며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와 같은 과거 사고들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끼슬리쨔 대사는 민간인 피해 방지를 위해 우크라이나 영공에 대한 비행금지를 요구했다. 그는 또 “아인슈타인은 ‘세상은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방관하는 사람들에 의해 망한다’고 말했다”며 국제사회의 행동을 거듭 촉구했다.

우크라이나 국가비상사태청(한국의 재난안전관리본부)은 전날 SNS에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던 중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주 에네르호다르시 원전 부지 내 ‘훈련용 시설’에서 불이 났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은 유럽 최대 규모인 이 원전 단지를 러시아에 장악당했다고 발표했다.

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에 화재가 발생한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서방 국가, 한목소리로 러시아 비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이 자리에서 한목소리로 러시아를 비판하며 공격 자제와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는 “어젯밤 러시아의 공격은 유럽 최대 원전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다”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고 위험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신의 은총으로 간밤에 세계는 핵 재앙을 가까스로 피했다”며 “전반적인 문제 해법은 러시아가 침공을 자제하고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전면 철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핵시설이 이번 분쟁의 일부가 돼서는 안 된다”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역의 15개 원자로를 위험하게 만들 추가 무력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영국과 프랑스, 아일랜드의 유엔대사들도 기자회견과 회의 발언을 통해 미국의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

바버라 우드 주유엔 영국대사는 “한 국가가 가동 중인 원전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국제법과 제네바 협약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니콜라 드 리비에르 주유엔 프랑스대사는 “우리는 원전에 대한 이번 공격을 강하게 규탄한다”며 모든 원자력 시설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상황을 점검할 것을 제안했다.

안보리 회의에 참석한 로즈마리 디칼로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도 “사무총장이 매우 불안한 마음으로 자포리자 원전 주변의 전투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다”고 전하며 “핵시설과 다른 중요 민간 인프라 주변에서의 군사작전은 용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서방 국가들의 비판에도 결의안이나 성명 채택과 같은 안보리 차원의 공식 조치는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당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이기 때문이다.

앞서 러시아는 지난달 25일에도 자국의 침공 행위를 비판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안보리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25년 만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유엔 긴급특별총회를 열어 같은 내용의 총회 결의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