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채플린에서 처칠로”…외신들의 ‘젤렌스키 재평가’

입력 2022-03-05 00:05 수정 2022-03-05 00:32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 사진)과 윈스턴 처질 영국 전 수상. AP 뉴시스, 임페리얼 워 뮤지엄 제공

러시아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여론전에서만큼은 러시아를 압도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고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영웅들의 이야기가 세계인에 감동을 주면서 러시아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 뒤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이 바뀌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이란 예상을 뒤엎은 그는 SNS를 통해 호소력 짙은 연설로 전국민의 결사 항전 의지를 다지고 있다. 개전 초 “코미디언 출신 초짜 대통령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조롱이 박수로 바뀌는 데는 불과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

타임지, 젤렌스키 특집기사 실어 …“지도자의 면모”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국기 형상과 함께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표지에 적힌 우크라이나어 문장은 지난 1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의회에서 “삶이 죽음을 이길 것이며, 빛이 어둠을 이길 것이다”라고 연설한 내용이 담겼다.

미 타임 표지에 등장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관련 기사. 타임 트위터 캡처

타임은 ‘어떻게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수호하고 세계를 통합시켰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시 그의 유럽의회 연설 장면을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한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코미디언 출신인 젤렌스키 대통령을 2차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세계적인 정치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에 빗댄 것이다.

타임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평소 감정적이고 예민한 데다 관심과 박수를 갈구하는 기질이 있다는 측근의 인터뷰를 담았다. 코미디언 같았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러시아군의 공격을 시작으로 용기 있는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타임은 “그가 대부분의 서방 정치인이 잊고 있던 투쟁심을 구현해냈다”면서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호평했다. 러시아의 거침 없는 행진에도 꿋꿋이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지킨 그의 행동에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찬사까지 보냈다. 그의 행동에 감명받은 미국과 서방세계는 강도 높은 러시아 제재에 나섰고, 독일·스위스 등 중립적 태도를 보이던 국가들도 마음을 돌렸다.

매체는 지난달 28일 키이우에 러시아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비보에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낙담하지 않았다는 인터뷰도 전했다. 안드리이 예르마크 대통령 비서실장은 “모두가 상황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지만 자유란 곧 조국 그 자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각)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페이스북 캡처

긴급한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지도부의 모습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침공 이튿 날인 지난달 25일 국무총리, 대통령실 인사, 여당 대표 등과 함께 키이우의 밤거리를 걷는 영상을 올리며 “조국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란 메시지를 공개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시 상황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중 죽는 게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다른 이들과 같다. 자기 목숨이나 자녀의 목숨을 잃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사람”이라면서도 “대통령에게는 그런 일을 두려워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경우에도 위험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라며 “대통령직을 맡지 않았다면, 다른 국민처럼 총을 들고 군에 합류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정부 청사와 대통령 집무실 복도에는 시가전에 대비한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고 외부로 총을 쏠 수 있는 사격 진지도 설치됐다고 한다. 군용 티셔츠를 입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하루 3시간 정도만 잔다고 매체는 전했다.

NYT “우크라이나 선전, 효과적으로 먹혀들어”

NYT는 호소력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국민 설득 전략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러시아어로 생중계된 TV연설에서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안에서 세 번째로 많은 민족”이라며 러시아인과의 유대감을 내세웠다. 가족애·모성애를 자극한 그의 연설은 러시아 내 반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주효했다고 매체는 분석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당국은 포로로 잡은 러시아 병사의 인적사항과 사진을 SNS에 올려놓고 “병사들을 데려가라”며 러시아군 부모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여론을 흔드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지난 2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붙잡은 러시아군 포로를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캡처

일각에선 우크라이나가 과장되거나 거짓된 정보를 영웅담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강대국에 맞서 전국민적 투쟁에 나서고 있는 이들 처지를 고려할 때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NYT는 전문가 발언을 인용해 “우크라이나의 온라인 선전은 주로 영웅과 순교자들을 다루며, 우크라이나인의 용기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라며 “분쟁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인의 사기를 높이고 국제적인 지지를 모으기 위해선 이같이 전략이 특히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FT “우크라이나, 여론전에선 이미 승리”

우크라이나가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여론전에선 이미 러시아에 승리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가했다.

존 손힐 FT 모스크바 전 지국장은 논평에서 “우크라이나 저항군은 이미 역경을 이겨내는 기술과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면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관리들이 명백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신뢰를 잃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시민사회의 협력을 끌어냈다”고 평가했다. 진심이 묻어난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과 SNS를 통한 빠른 전파가 항전 의지를 모으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여론을 도외시한 채 자국 내 선전전에 몰두하고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유혈사태가 이어지는 시점에서 이같은 통제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국민일보는 3일부터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현지 발음인 ‘키이우’로 표기합니다. 다만 혼선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표기인 키예프를 괄호 안에 병기합니다. 이는 국립국어원의 권고와 우크라이나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입니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