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선거 선상투표가 진행 중인 가운데 배 위라는 공간적 특성상 ‘비밀투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투표지를 팩스나 위성인터넷으로 전송하는 과정에서 투표 결과가 노출되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3만t급 화물선 선장 한모(50)씨는 3일 국민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현실적으로 비밀투표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정치적 성향이 다른 선원들의 투표에 선장이 영향을 미치는 등 한계도 많다”고 말했다.
선상투표는 부재자 투표의 하나로 투표에 참여할 수 없는 선원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2012년 18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대선과 총선에서 각각 두 차례씩 진행됐다.
도입 추진 과정에선 폐쇄적인 선내에서 비밀투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선장이 투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해외 사례 등에 비춰 선원들의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으면서 제도화됐다. 이번 20대 대선에는 444척 선박에 탄 3267명의 선원이 지난 1일부터 4일까지 투표권을 행사한다.
선상투표는 배 안에서 투표를 한 뒤 투표지를 팩스나 위성인터넷을 통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송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기기 사용 방법이 복잡해 다른 선원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게 선원들의 설명이다. 특히 위성인터넷을 이용할 때는 투표지를 복합기로 스캔한 뒤 생성된 전자파일을 선관위 홈페이지에 등록해야 하는데, 고령의 선원들은 도움 없이 투표하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투표 결과가 노출되거나 타인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팩스 기기 자체의 한계도 있다. 선박에 있는 팩스 기기의 메모리에 투표용지 데이터가 저장되거나, 전송 이후 확인 종이가 인쇄돼 나오면서 기표 내용이 공개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항해사 유모(34)씨는 “과거 대선 때 특정 후보를 찍은 게 드러나 상급자에게 혼나고 욕설까지 들은 적이 있다”며 “투표는 비밀로 진행돼도 전송 과정에서 결국 노출된다. 그 이후로 다시는 선상투표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현실적인 제약도 크다. 통신 속도가 느린 바다 위에서 팩스를 보내거나 선관위에 파일을 등록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한씨는 “위성인터넷을 쓰는 선박에선 웹페이지를 하나 열기도 쉽지 않다”며 “4명이 선상투표 대상인데 기상상태가 나쁘거나 통신이 어려운 구간을 지날 땐 아예 전송할 수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주변의 많은 선장들이 투표 과정에 피곤함을 느껴 선상투표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덧붙였다.
선관위는 선장의 투표 방해행위 등에 대한 처벌규정을 두고 비밀보장도 의무화하고 있지만 폐쇄적인 선상에서 이 같은 규정이 실제로 지켜지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선상투표에 대한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고, 선거인의 투표참여가 제고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