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어찌 이토록 홀연히 가십니까.
‘메멘토 모리’, 늘 죽음을 생각하라는 좌우명에 살면서도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하시던 선생님. 그 약속 지키지 않으시고 저희를 두고 이웃 마실을 가듯 그렇게 가십니까. 저 또한 주님 품에 안기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 선생님 곁에 있겠다는 약속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성탄절에 국민일보가 던진 삶과 죽음,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죄성 등 스물다섯가지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마지막 답을 남기시고 한 시대의 현자는 이렇게 가시는 것입니까?
죽음을 통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신 선생님, 지성에서 영성으로 들어가신 선생님, 이 시간처럼 언어가 무력함을 느낄 때가 없습니다. 이 순간처럼 애도의 노래가 부질없음을 절감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저의 가난한 언어를 기울이고 음치의 노래라도 바치지 않으면 오래 후회할 것 같아 떨리는 붓을 들고 꺼이꺼이 웁니다.
선생님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시대의 지성으로 사셨습니다. 진정한 지성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수많은 글과 말과 얼로 보여주셨습니다. 백 권이 넘는 ‘이어령 라이브러리’를 남기시고도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으신 투혼은 나약한 지성인이기를 거부한 저항의 문학이며 초인의 사상입니다. 퍼 올린 창조의 샘 저 밑바닥에 아직 고여 있는 원유를 시추하기 위해 임종 직전까지 집필 계획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으시고, “이 글을 다 쓰기 전에는 나 안 죽어!” 하고 무언의 절규를 하신 우리 시대의 지성이셨습니다. 아아, 선생님이 터 잡아 놓은 집필 초록을 그 누가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이 젊은 날 쓰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In this Earth in that Wind) 영문판을 미국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하면서 당신의 사상이 미국대학 강의실에서 토론되고 있음을 일찍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보다 선생님은 지성을 넘어 영성의 세계로 들어오신 복된 신앙의 현자이십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통해 자신을 주님의 옷자락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싶은 무신론자라고 고백하시더니 어느 날 주님께 붙잡혀 제단에 바쳐진 제물처럼 자아를 꺾으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옛사람이 죽고 주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살면서, “나는 지성에서 겨우 영성의 문지방을 넘었을 뿐”이라고 겸비하신 선생님은 우리 시대의 바울, 우리 시대의 에스겔 같은 영성가로 사셨습니다. 그랬기에 이병철 선생이 죽기 전에 깨닫고자 한 ‘인생의 24가지 질문’에 답을 주시고 기독교 일간지가 던진 인간의 근원적 질문에도 현자의 가르침을 남기셨지요.
선생님, 이 말석의 종을 생전에 그토록 사랑해주시고, 자주 불러 신앙의 대화를 청하신 것도 선생님께서 지성을 넘어 영성의 세계로 들어오신 덕분입니다. 더욱이 생의 마지막 주님이 부르시면 조촐한 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하신 것도 우리가 함께 천국 시민이 된 때문입니다. “내가 죽으면 수많은 몽당연필을 깎아 무상으로 전국 문방구에 놓아 어린이들이 가져가게 하고 싶다”며 선생님의 지성과 영성이 몽당연필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해지기를 바라셨지요.
선생님,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이토록 순전한 어린아이였던 선생님, 이제는 주님 품에서 편히 쉬십시오. 불면의 밤을 거두시고 푹 단잠을 주무십시오. 저도 곧 가겠습니다. 이렇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선생님, 다시 뵐 때까지 안녕!”
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