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당분간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1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스위스 취리히 오페라극장이 전날 네트렙코로부터 받아 공개한 메시지에 따르면 “지금은 음악이나 공연을 할 때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무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기로 했다. 이것은 내게 매우 어려운 결정이지만 관객들이 이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되어 있다. 네트렙코는 오는 26·29일 스위스 취리히 오페라극장의 오페라 ‘맥베스’에 출연이 예정돼 있었다. 네트렙코는 2일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남편 유시프 에이바조프와의 리사이틀이 예정됐던 독일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홀과 9·12·16·19일 오페라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에 출연할 예정이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에도 공연 취소를 통보했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소프라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네트렙코가 당분간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친밀했던 예술가들에 대한 여론 악화 때문이다. 앞서 ‘푸틴의 친구’로 소문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난달 25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미국 공연에서 배제된 것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 공연장과 오케스트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 그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라 스칼라 극장을 비롯해 오랫동안 수석지휘자를 맡았던 독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게르기예프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했지만, 게르기예프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잇따라 관계 중단 또는 계약 해지를 발표했다.
푸틴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네트렙코 역시 지난달 25일 덴마크 아르후스에서의 리사이틀이 현지 정치인 및 시민들의 비판에 개막 1시간을 앞두고 취소된 바 있다. 네트렙코의 경우 게르기예프만큼 아니더라도 푸틴과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네트렙코는 지난 2012년 푸틴의 대선 출마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침공 및 합병 당시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사진을 SNS에 올린 바 있다. 푸틴 대통령 역시 네트렙코 50번째 생일 기념 콘서트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치르도록 했다.
네트렙코는 공연이 취소된 다음 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영어와 러시아어로 “나는 이 전쟁을 반대한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조국을 사랑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많은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프다”고 밝혔다. 하지만 네트렙코는 “예술가를 비롯한 공적 인물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말하거나 조국을 비난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이 발표 이후 서구 공연계에서 네트렙코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침묵하는 게르기예프보다는 낫지만, 네트렙코의 발표 내용이 전쟁에 반대하지만 푸틴 지지까지 철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 언론은 “네트렙코가 전쟁에 대해 비판했지만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네트렙코는 당분간 공연을 중단하겠다는 발표 이후 게르기예프와 함께 콘서트를 마친 후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사진에 대한 언급은 없어도 최근 푸틴과의 친분으로 공격받는 게르기예프와의 유대를 드러낸 것이다. 결국, 독일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은 오는 7월 예정됐던 ‘맥베스’와 관련 지휘를 맡았던 게르기예프는 물론이고 주역인 네트렙코와의 계약을 취소했다고 1일 발표했다. 앞서 지난달 28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역시 푸틴과 밀접한 예술가 및 예술기관과의 관계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게르기예프 그리고 네트렙코라고 전했다.
네트렙코가 언제 다시 무대로 돌아올지는 미지수다.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홀이 2일 예정됐었던 네트렙코의 콘서트를 2022-2023시즌 초반인 9월 7일로 잠정 연기했지만 현재 분위기로는 더 미뤄지거나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종식된다고 해도 푸틴에 대한 비판이 한동안 가라앉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만큼 푸틴 지지 예술가들에 대한 여론 역시 쉽게 호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귀한다고 해도 게르기예프나 네트렙코가 예전의 국제적 명성과 지위를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 많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