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폭주’ 협상 중에 민간지역 폭격… 뜻대로 안 돼 급해졌나

입력 2022-03-01 17:41 수정 2022-03-01 18:40

러시아가 전쟁 중단을 위한 협상 중에 대량살상무기로 의심되는 로켓포로 우크라이나 대도시 민간지역을 폭격했다. 공세를 이어갈수록 승기를 잡기는커녕 수세에 몰리자 무력에 더욱 의존하며 폭주하는 모습이다. 우크라이나는 서방과의 긴밀한 연대 속에 유럽연합(EU) 가입 절차에 착수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군이 2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 주거지역에 집속탄 등 국제적 금지 무기가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 폭격을 가해 민간인이 다수 사상했다고 보도했다. 약 150만명이 사는 하르키우는 하르키우주(州) 주도로 우크라이나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올레그 시네구보프 하르키우 주지사는 텔레그렘을 통해 “러시아 적군이 주거지역을 폭격하고 있다”며 “현재 1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안톤 게라셴코 우크라이나 내무장관 보좌관은 “(지금까지) 하르키우에서만 수십 명이 숨졌고 부상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고르 테레호프 하르키우 시장은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에서 “오늘은 이것이 전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살인임을 보여줬다”며 “하르키우가 폭탄이 주택을 강타하고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따위의 일을 겪기는 오랜 역사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마크 히즈네이 부국장은 이번 공격에 대해 “집속탄을 사용한 무차별 공격”이라고 규탄했다. 집속탄은 하나의 폭탄 안에 소형폭탄 여러 개가 들어가 있는 대량살상무기다. 베트남전, 캄보디아 내전, 걸프전, 코소보 내전, 아프가니스탄 공습 등에 쓰였다. 2010년 8월 집속탄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이 발효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조약 가입국이 아니다.

옥사나 마르카로바 주미 우크라이나대사는 “러시아가 제네바협약에서 금지한 진공폭탄(열압력탄)을 사용했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가하려는 피해가 크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진공폭탄은 주변 산소를 빨아들여 고온의 폭발을 일으키는 무기로 ‘방사능 없는 핵폭탄’으로 불린다.

다음날인 1일(현지시간) 오전 8시쯤에도 하르키우 중심부 지방정부청사 바로 앞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다. 통행금지 해제 2시간 뒤였다. 이곳을 지나던 차량 여러 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해당 공습이 청사를 노린 로켓 공격이라며 주지사를 비롯한 하르키우 지도부를 죽이려는 시도였다고 발표했다.

치명적 무기로 민간지역을 타격한 이번 공격은 상황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자 조급해진 러시아의 심리를 노출한다. 애초 러시아군은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수도 키예프와 하르키우를 단숨에 장악해 우크라이나를 무력화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CBS뉴스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최대 도시(키예프)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훨씬 더 적은 우크라이나군에 저지당해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영국 국방부는 1일 “러시아의 키예프 진격은 아마도 지난 24시간 동안 거의 진전이 없었다”며 “계속되는 병참문제 탓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르키우에서도 러시아군은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침공을 시작한 지난 24일부터 하르키우를 둘러싸고 외곽을 폭격했지만 대부분 우크라이나군에 저지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NYT는 “(지금까지) 그들(러시아군)은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며 “러시아군의 공격 5일째인 28일 하르키우가 로켓포에 맞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올렉시 레즈니코프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페이스북을 통해 “평화로운 도시에 대한 야만적 로켓 공격과 MLRS(다연장로켓)는 (러시아군이) 무장한 우크라이나군과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양국 대표단이 벨라루스에서 협상 중임에도 러시아군이 공격을 감행한 사실을 비난했다. 러시아가 무력행사로 겁을 줘 협상에서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는 게 우크라이나의 판단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8일 영상 연설에서 “협상은 우리 영토, 우리 도시에 대한 폭격과 포격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며 “로켓포로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양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재판소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인 행동을 조사해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서 제외할 것도 제안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카림 칸 검사는 “전범 혐의와 반인도적 범죄가 모두 저질러졌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며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가입 신청서에 서명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막을 수 있도록 특별절차에 따라 즉시 회원 자격을 얻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유로뉴스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EU 회원국 가입을 원한다고 말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1일 오후 벨기에 브뤼셀에서 혼데어라이엔 위원장을 만나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지원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폴란드 대변인은 “이 주제는 EU 회원국이라는 맥락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5시간가량 진행된 양국 간 첫 회담은 이렇다 할 결과물 없이 끝났다. 양측은 일단 자국으로 돌아가 협의를 거친 뒤 수일 내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에서 2차 협상을 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끈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실 고문은 회담 후 트위터에서 “안타깝게도 러시아 측은 자신들이 시작한 파괴적 과정에 대해 여전히 극도로 편향돼 있다”고 비판했다.

강창욱 기자,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