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10월 고선웅이 연출한 국립극단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중국 베이징 국가화극원 무대에 올랐다. 한한령 여파로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지만, 이 공연은 그동안 중국에서 선보인 한국 연극 가운데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현장에서 기립박수가 이어지는가 하면 공연 이후 적지 않은 중국 언론과 평단이 호평으로 가득한 리뷰를 내놓았다. 실례로 중국 극작가 겸 연출가 양션은 “중국 극장에서, 중국 이야기를 가지고, 중국 관객을 정복했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13세기 중국 원나라 시대 잡극 작가 기군상(紀君詳)의 ‘조씨고아’를 고선웅이 각색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를 무대로 대장군 도안고에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비극과 후손을 살리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2015년 초연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그해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등 주요 연극상을 석권했으며 국립극단의 최고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연극, 뮤지컬, 창극, 오페라 등 장르를 오가며 대중과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은 지난 2019년 자신의 극단 마방진에서 중국의 문호 라오서(老舍)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낙타상자’를 선보였다. 라오서가 1937년 발표한 소설을 1998년 중원눙이 현대 경극으로 각색한 버전으로 인력거군 상자의 삶을 통해 1920년대 말기 하층민들의 참상을 그렸다. 고선웅은 이 작품으로 또다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며 그해 한국극예술학회 올해의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국내 연극계에서 자주 무대화되는 일본 희곡과 달리 거의 공연되지 않는 중국 희곡으로 두 차례 화제작을 만든 고선웅이 이번에 또다시 무대화에 나섰다. 오는 5일 개막해 2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되는 ‘회란기’로, 고선웅이 ‘낙타상자’에 이어 3년 만에 극단 마방진과 올리는 작품이다.
13세기 원나라 잡극 작가 이잠부(李潛夫)가 쓴 ‘회란기’는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인이 친권을 다투는 내용으로 ‘중국판 솔로몬왕의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부유한 마씨의 부인이 남편을 독살한 후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첩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한편 첩의 아이를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현명한 판관에 의해 실패한다. 인간의 도리와 당시 사회상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이 작품은 훗날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대표작인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원작이 됐다.
고선웅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옛날 사람들의 연극이 늘 궁금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원나라 시대 잡극을 접했을 때 연극의 원형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무대나 소품 없이 놀이성이 강한 연극 형식이 흥미로웠다”면서 “엄밀히 말해 중국에 관심 있다기보다 옛날 희곡의 경제성에 매력을 느꼈다”면서 중국 희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가 무대화했거나 준비 중인 3편의 중국 작품 가운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과 ‘회란기’가 모두 중국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다. 중국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춘 최초의 희곡으로 평가받는 잡극은 당나라 때부터 발달한 다양한 서사적 공연예술이 집약된 것이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부터 당시 사회상의 풍자 등 이야기의 종류가 다양해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고선웅은 “중국의 고전 희곡은 선악의 이야기가 분명하다. 극 중 인물들이 선하게 살기 위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면서 “나는 쉬운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주는 연극을 하고 싶다. 연극은 예나 지금이나 관객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감동하는 장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회란기’는 새롭게 모색하고 조명할 연극적 가치가 풍부하다. 이번 공연에서는 연희적인 양식을 더욱 확대해 마방진식의 대중극을 표방하고 싶다”면서 “막 무친 겉절이처럼 놀이성과 문학성이 풍부한 원형의 연극으로 관객과 만나고 싶다”며 연출 의도를 전했다.
일본 희곡이 2000년대 이후 앞다퉈 국내에서 공연되면서 ‘연극계의 일류(日流)’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인기가 높은 데 비해 중국 희곡은 제대로 소개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 2018년부터 한중연극교류협회의 ‘중국희곡 낭독공연’이 시작돼 전통희곡 및 현대희곡 27편이 번역·출판됐으며, 이 가운데 ‘낙타상자’ ‘물고기 인간’ 등은 무대화까지 됐다.
고선웅은 “중국 현대 희곡은 아무래도 동시대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는 작품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중국 연극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좀 더 쌓이면 희곡을 깊이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면서 “이에 비해 중국 고전 희곡은 우리에게 정서적으로 친숙해서인지 관객이 쉽게 빠져든다. 그런 걸 보면 한·중·일 연극이 같은 문화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밝혔다.
고선웅과 중국 희곡의 인연은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고선웅은 오는 4월 한중연극교류협회의 제5회 중국희곡 낭독공연에서 라오서의 걸작 희곡 ‘찻집’(1957년)을 맡았다. 중국 근대 시기 베이징의 한 찻집을 무대로 펼쳐지는 민초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담은 ‘찻집’은 지금도 중국에서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앞서 고선웅이 제1회 중국희곡 낭독공연에서 선보인 ‘낙타상자’를 이듬해 본 공연으로 올렸던 것을 생각할 때 이번 ‘찻집’ 역시 머지않은 시기에 국내에서도 본공연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