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관련 대회 및 경기를 ‘보이콧’하는 스포츠계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축구, 포뮬러1(F1), 유도에 이어 배구, 체조 등도 올해 러시아에서 예정된 대회 및 경기를 취소하고 장소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 기업의 후원을 받아온 구단들은 계약을 취소하고 있다. 선수들은 ‘전쟁 반대’를 외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팬들 역시 경기장에서 한목소리로 우크라이나 평화를 호소했다.
국제체조연맹(FIG)은 26일(현지시간) 집행위원회를 열고 올해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예정된 FIG 월드컵과 챌린지컵을 모두 취소하고, 추가 공지 전까지 양국에 어떤 대회도 배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FIG 주관 대회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이에 동조한 벨라루스 두 나라의 국기·국가 사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FIG의 결정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IOC는 앞선 성명에서 패럴림픽 폐막 일주일 뒤까지 휴전하겠다고 한 결의를 러시아 정부가 위반했다고 규탄하며 모든 국제 스포츠 연맹에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계획된 스포츠 행사를 이전·취소하라고 촉구했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러시아에서 대회를 강행하려다 반발에 부딪히자 하루 만에 꼬리를 내렸다. FIVB는 26일 러시아배구연맹에 오는 6~7월 러시아에서 치르기로 한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를 다른 곳에서 치르기로 했다고 알렸다고 밝혔다. 또 우크라이나 사태를 주시해 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를 포함해 러시아에서 예정된 다른 대회도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FIVB는 전날만 해도 “스포츠는 항상 정치와 분리돼야 한다”며 세계선수권대회를 러시아에서 개최할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평화와 안전을 강조하는 스포츠정신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우크라이나배구연맹은 FIVB와 유럽배구연맹(CEV)에 “러시아가 시작한 전쟁”이라며 “세계선수권대회 개최지를 변경해달라”고 촉구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플레이오프(PO) 경기에서도 보이콧 움직임이 이어졌다. 스웨덴축구협회는 “월드컵 PO에서 러시아와 맞붙을 경우 경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폴란드에 이어 두 번째다. 칼-에리크 닐손 스웨덴축구협회 회장은 “러시아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침략으로 축구 교류가 불가능해졌다”며 “러시아가 참가하는 PO 경기를 취소할 것을 FIFA에 촉구한다. FIFA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러시아와 경기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챔피언스리그(UCL) 결승전 장소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파리로 변경했다. F1을 주관하는 세계자동차연맹도 9월 러시아 소치에서 예정된 F1 월드 챔피언십 러시아 그랑프리를 개최하지 않기로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명예회장인 국제유도연맹도 오는 5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리는 그랜드슬램 대회를 취소했다.
러시아 기업의 후원을 받는 구단들은 계약취소에 나섰다. 프리미어리그(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러시아 항공사 아예로플로트와의 4000만파운드(약 645억원) 후원 계약을 취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독일 명문 샬케04는 16년간 메인스폰서였던 러시아 석유회사 가즈프롬 로고를 유니폼에서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첼시를 PL 명문구단으로 만든 러시아 출신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구단 운영 권한을 포기하고, 첼시 구단의 공익 재단에 맡기기로 했다. 이번 결정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아브라모비치가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첼시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요구가 최근 빗발쳤다. 이런 가운데 토마스 투헬 감독은 “우크라이나를 도울 수 있다면 (리버풀과의) 카라바오컵 결승에서 진다고 해도 행복할 것”이라고 소신발언을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육상 여자 높이뛰기 선수 야로슬라바 마후치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폭발과 총성을 들으며 일어난다”며 “우리에게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남자 테니스 세계랭킹 1위로 등극한 러시아 출신 다닐 메드베데프는 자국의 침공을 안타까워 하며 “세계랭킹 1위는 어릴 적부터 목표였지만 지금은 즐길 수 없다”며 “테니스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늘 생각했다. 감정이 복잡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루블레프 역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듀티 프리 챔피언십 남자 단식 준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No War Please(제발 전쟁을 멈추라)’라는 글을 남겨 주목받았다.
PL 에버튼과 맨체스터시티의 경기에서는 팬들과 선수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복장으로 연대를 표했다. 팬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경기 전 우크라이나 국가도 연주됐다. 우크라이나 대표팀 올렉산드르 진첸코는 눈물을 보이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