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예술가들이 국제 사회에서 잇따라 보이콧을 당하고 있다. 평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지지를 드러낸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러시아 정부와 연관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예술가 및 예술단체로 확산하는 추세다. 반면 우크라이나 예술가에 대한 연대 표시와 함께 긴급 지원에 나서는 움직임도 보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총감독 겸 음악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평소 푸틴 대통령과 각별한 것으로 유명한 만큼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자 바로 악화된 여론의 타깃이 됐다. 게르기예프는 이번 사태에 대해선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지만 그동안 푸틴의 각종 행보에 대해 지지를 표명해 왔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침공 및 합병에 대해 지지 성명을 낸 것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그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구미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극장의 포디움에서 제외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지난 25일(현지시간)부터 3월 2일까지 예정된 미국 공연에서 게르기예프를 제외했다. 25~27일 뉴욕 카네기홀과 3월 1~2일 플로리다주 아티스-네이플스에서 공연이 예정됐던 빈필은 악화하는 미국 여론에 지휘자를 교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네기홀과 빈필은 게르기예프를 대신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 야닉 네제 세겡에게 지휘를 맡기는 한편 25일 협연자 역시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대신 한국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내세웠다.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은 지난 2017년 카네기홀에 데뷔한 적 있지만 빈필과의 협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네기홀은 하루 만에 독일 베를린에서 뉴욕으로 날아온 조성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빈필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지만, 플로리다 공연 역시 게르기예프 대신 다른 지휘자와 함께할 예정이다. 또 카네기홀은 5월 3~4일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공연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게르기예프는 미국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퇴출당하는 분위기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 시장이자 라 스칼라 극장 이사회 멤버인 주세페 살라 시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게르기예프에게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3월에 예정된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지휘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지난 23일 게르기예프 지휘로 막을 올린 ‘스페이드 여왕’은 앞으로 3월 5·8·13·15일 공연이 예정돼 있다.
게르기예프가 오랫동안 수석지휘자를 맡았던 독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역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게르기예프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게르기예프가 이번 전쟁을 비판하고 푸틴 대통령과 공식적으로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앞으로 관련 공연과 페스티벌을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도 25일 7~8월 예정됐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로열오페라하우스는 “올여름 시즌 볼쇼이 발레단의 투어 공연 계획이 마지막 단계에 있었지만, 불행히도 현재 상황에서는 시즌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또 올해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아예 러시아 예술가(단체)의 참가는 물론 러시아 시청자의 투표도 금지했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유럽방송연맹에 소속된 각국의 방송사가 매년 선발한 대표들이 모여 노래와 퍼포먼스를 겨루는 경연 대회로 40여 회원국에 생중계된다. 지난해 기준으로 시청자만 1억 8300만 명에 달하는 세계적 행사다. 하지만 유럽방송연맹 노조는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고려할 때 올해 대회에 러시아를 참가시키는 것은 대회를 더럽히는 것이다”고 밝혔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덴마크 공연도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25일(현지시간) 취소됐다. 네트렙코는 이날 저녁 덴마크의 제2의 도시인 아르후스의 콘서트홀에서 남편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함께 리사이틀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덴마크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이 네트렙코의 푸틴 지지를 비판하며 콘서트홀에 취소를 요구했다.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콘서트홀은 개막을 한 시간 앞두고 공연 취소를 발표했다.
네트렙코는 국제무대 활약을 위해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현재 빈에 거주 중이다. 하지만 러시아 국적도 보유한 이중국적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푸틴 지지를 여러 차례 밝혀 왔다. 네트렙코는 공연이 취소된 다음날 페이스북을 통해 영어와 러시아어로 “나는 이 전쟁을 반대한다. 나는 러시아인이고 조국을 사랑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많은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예술가를 비롯한 공적 인물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말하거나 조국을 비난하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서구 예술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한다는 네트렙코의 발표를 환영하고 있다. 침묵을 택한 게르기예프와 달리 네트렙코의 행동이 용감하다는 것이다. 네트렙코에 앞서 러시아의 스타 아티스트들인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상임 안무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 등이 이번 전쟁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낸 바 있다. 다만 키신과 라트만스키는 이미 영국과 미국으로 귀화한 데다 페트렌코는 앞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을 역임하는 등 독일이 활동거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 연출가로 모스크바 메이어홀드 센터 예술감독인 엘레나 코발스카야처럼 전쟁에 반대하며 사직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에 거점을 둔 예술가들이 반전 및 푸틴 반대를 피력하기엔 쉽지 않아 보인다.
한편 세계 각국 예술계에서는 위기에 놓인 우크라이나 예술가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유럽의 대표적인 현대무용 플랫폼인 에어로웨이브즈 등 예술기관들이 앞다퉈 전쟁 반대 성명을 낸 데 이어 유럽 최대 무용 마켓인 독일 탄츠메세는 예술가들에게 반전 시위 참여를 촉구하고 나섰다. 또 에스토니아의 아트앤테크 레지던시, 덴마크의 ‘뉴 데모크라시 펀드’, 리투아니아의 로우 에어 댄스 컴퍼니 등이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이 머물 수 있는 긴급 레지던시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