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서울대에 몇 명 갔냐는 질문은 그만둘 때가 됐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소질과 재능을 발휘하고, 건강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잘 받도록 하는 ‘학교다운 학교’가 돼야 합니다.”
서울 ‘강남 8학군’에 속한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중동고의 이명학 교장은 지난 22일 학부모들에게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학생들의 성적에만 관심을 쏟고, 대학교 진학 결과로 고등학교를 평가하는 시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그의 편지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공개되자 “참스승이 나타났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이 교장은 2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명문고등학교의 기준은 명문대 진학률이 아니라 졸업생들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며 “그 고교 출신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동고가 모교인 그는 지난해 중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전까지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를 지내면서 한국한문교육학회장, 한국고전번역원장 등을 역임했다.
부임한 뒤 학교의 인재상을 ‘창조적 글로벌 리더’에서 ‘의롭게 생각하고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꿨다. 교육 목표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기개와 의로움을 보여준 학생에게 대학교 1년 장학금을 주는 ‘미스터 중동인상’ 등을 도입했다. 이 같은 변화엔 학교가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사람을 키워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 교장의 교육 철학이 반영됐다.
그는 애초 올해부터 학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울대 합격자 수를 적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쏟아지는 학부모들의 질문에 결국 “여러분이 자꾸 물어오시니 도리없이 알려드려야 할 것 같다”며 재학생 24명을 포함해 33명이 서울대에 합격한 사실을 밝혔다. 재학생 숫자만 놓고 보면 2019~2021학년도 20~21명에서 이 교장 부임 후 더 늘어난 셈이다.
이 교장은 “수년 전 어느 동문이 서울대 합격자 수를 올리면서 ‘이사장님과 교장 선생님이 애쓰셨다’라고 쓴 글을 봤는데,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고 과거의 기억을 언급하며 “서울대 합격이 이사장, 교장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 교장은 높은 명문대 입학률은 “모든 교사와 노심초사한 학부모, 학생들이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며 “이사장과 교장이 학생과 교사를 닦달한다고 입학 성적이 좋아지느냐.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그런 짓을 해서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여기는 사람을 교육하는 ‘학교’지 입학 성적으로 먹고사는 ‘학원’이 아니다”며 “10%도 안 되는 학생의 성과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90% 학생이 어떤 교육을 받고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장은 “근 7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 서울대에 몇 명이나 갔느냐’는 질문이 우리 사회와 학교 교육을 얼마나 피폐하게 했는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한다”고 당부했다.
편지를 받은 학부모들은 이 교장에게 감사함을 전했다고 한다. 한 학부모는 “그동안 잘못된 고교서열화에 아무 생각 없이 빠져 있었다”며 이 교장의 발언에 공감했다고 전했다.
이 교장의 편지가 온라인에서 공개되자 사연을 접한 누리꾼들도 “진정한 교육자시다” “맞는 말. 학교는 입시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참 어른. 참스승” 등의 반응을 보였다.
중동고를 졸업한 이 교장은 성균관대 한문교육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3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교장 부임 전인 2020년 tvN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평생 연구하고 가르쳐왔던 한자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들려줘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방송에서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과 100대 좋은 강의상 선정을 통해 받은 상금 모두를 장학금으로 기부한 사실이 공개됐다. 그는 부친의 유산 10억원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이예솔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