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등 서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하루 만에 강력한 제재안을 내놨다. 이번 제재안은 핵심 금융기관에 대한 제재, 수출 통제를 포함했다는 점에서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러시아의 목을 직접 겨눌 수 있는 핵심 방안들은 서방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빠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및 주요 7개국(G7) 동맹과 협의해 반도체 등 하이테크 제품의 러시아 수출을 통제하고 러시아의 4개 주요 은행을 제재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 포괄적인 제재 방안을 공개했다. 제재안에는 러시아의 경제 및 국제 경쟁력에 치명타를 주기 위한 첨단 제품·부품에 대한 수출 통제, 러시아 대형 은행의 대외 거래 차단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번 제재안은 전날 나온 1차 제재에 비해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스베르방크와 VTB 등 두 은행을 비롯해 핵심 금융기관 90여 곳이 포함된 탓이다. 앞서 미국 정부가 제재하겠다고 발표한 VEB와 PSB는 사회간접자본과 군수산업 지원용 국책은행으로 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4위에 해당하는 6310억 달러(752조원)로 외부 경제 제재를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재 대상에 소매금융 역할을 하는 시중은행 2곳을 포함하면서 실제 러시아 국민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할 전망이다. 또 시중은행을 제재하면 러시아 기업들은 외국으로 수출한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는 금융시장의 패닉에 이어 주식시장 붕괴와 급격한 인플레이션 등을 야기할 수 있다.
수출 통제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압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중국 기업 화웨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해외 직접 생산품 규칙(FDPR)’을 러시아식으로 적용해 반도체, 컴퓨터, 통신 등을 중심으로 항공우주, 국방 등 러시아 산업에 타격을 준다는 계획이다. FDPR이 적용되면 미국 밖의 외국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제조 과정에서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장비나 소프트웨어, 설계를 사용했을 경우 수출이 금지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카드로 평가되는 방안 중 일부는 제재를 가하는 서방의 목도 겨눌 수 있는 ‘양날의 검’이란 점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러시아의 주력 수출 분야인 에너지 부문에 대한 금수조치다.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 같은 에너지 기업을 제재하면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러시아는 주요 석유·가스 수출국으로, 유럽은 천연가스 공급의 약 4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을 막기 위해 거래를 차단하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한 고위 당국자는 “고유가를 감안할 때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차단하면 (치솟는) 가격은 푸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제재는 우리가 아닌 러시아 경제를 타격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고 밝혔다.
금융제재와 관련해 최후의 카드로 꼽혔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퇴출하는 안도 이번엔 빠졌다. 스위프트는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안전하게 결제 주문을 주고받기 위해 쓰는 전산망이다. 만약 스위프트에서 퇴출되면 러시아는 수출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제재 수단으로 거론돼 왔다.
그러나 이 방안은 EU 국가들의 반대에 부닥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스위프트에서 퇴출되면 러시아 금융 시스템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는 있지만 동시에 서방 국가의 은행들 역시 러시아에 빌려준 자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도 이날 제재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유럽 국가들이 현시점에선 원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 우크라이나 침공을 결정한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직접 제재가 포함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제재 카드는 상징성이 크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에 대한 제재를 두고 당장 활용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란 주장도 있으나, 일각에선 분쟁 종식을 위한 외교를 더 활용하기 위해 여지를 둬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번 제재안에 포함되지 않은 핵심 제재 방안들은 향후 우크라이나 사태의 추이에 따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달리프 싱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의 공격이 확대될 경우 제재가 보다 강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