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지지’ 지휘자 게르기예프, 빈필의 뉴욕 공연 하차

입력 2022-02-25 10:35 수정 2022-02-25 23:13
발레리 게르기예프 러시아 마린스키극장 총감독 겸 예술감독이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열리는 '러시아 시즌' 일환으로 내한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황제)’로 불리는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25~27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예정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필)의 콘서트를 지휘하지 않는다고 미국과 오스트리아 언론이 두 단체의 발표를 인용해 24일(현지시간) 일제히 보도했다.

두 단체가 게르기예프의 공연 제외 이유를 직접 발표하지 않았지만, 미국과 오스트리아 언론은 게르기예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오랜 지지자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앞서 빈필이나 카네기홀 모두 이번 공연을 앞두고 “게르기예프는 정치가가 아닌 예술가로 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전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높아지자 결국 게르기예프 제외로 결론내렸다.

게르기예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지만 과거 푸틴 대통령의 대(對) 우크라이나 행보를 지지해 왔다. 게르기예프는 1990년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정보기관 KGB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 정치인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 대통령은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게르기예프 역시 푸틴에 대한 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게르기예프는 2008년 남오세티야를 둘러싼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 직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공연을 갔다. 당시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을 비판하는 서구에 맞서 푸틴의 입장을 대변한 셈이다. 또 2012년 푸틴의 3번째 대선 출마 때는 TV에서 지지 연설을 했다. 이어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침공 및 합병에 대해 게르기예프는 문화예술계 인사 19명과 함께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서방세계의 간섭을 비판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에도 국제 사회의 여론과 달리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원한 푸틴 대통령과 발을 맞춰 시리아 팔미라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게르기예프의 이런 전력 때문에 카네기홀에 게르기예프가 서는 것은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됐다. 앞서 2013년에도 러시아가 반(反)동성애법을 제정한 직후 그가 지휘를 맡은 유럽과 미국의 공연장에는 동성애 단체와 인권 단체의 시위가 잇따르기도 했다. 이번 카네기홀 공연을 앞두고도 미국에서는 트위터에 ‘#CancelGergiev’가 퍼지기 시작하는 등 부정적인 여론이 큰 상태였다.

카네기홀과 빈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이번 공연에서 게르기예프가 지휘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한편 25일 협연이 예정됐던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도 불참한다고도 전했다. 마추예프 역시 푸틴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아티스트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지지를 표명한 바 있다. 게르기예프를 대신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감독인 야닉 네제 세갱이 지휘를 맡게 됐다. 다만 아직 마추예프의 후임자는 발표되지 않았다.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 공연계는 러시아 아티스트 초청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들이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는 가운데 러시아 예술가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예술과 정치는 별개이지만 푸틴을 지지하는 아티스트라면 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탈리아에서도 밀라노 시장이자 라 스칼라 극장 이사회 멤버인 주세페 살라 시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게르기예프에게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3월에 예정된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지휘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지난 23일 게르기예프 지휘로 막을 올린 ‘스페이드 여왕’은 앞으로 3월 5·8·13·15일 공연이 예정돼 있다.


지난 2017년 10월 바딤 레핀과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부부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투 애즈 원(two as one)' 공연에 함께 출연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당장 우리나라에서는 오는 26~27일 피에타리 잉키넨 음악감독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이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과 협연한다. 바딤 레핀은 정치색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지만 그의 아내인 스타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푸틴 지지자로 유명하다. 현재 볼쇼이 발레단 수석무용수인 자하로바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가노바를 졸업한 뒤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다 볼쇼이 발레단으로 이적했다. 자하로바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침공 및 합병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었다. 그해 겨울 자하로바가 우크라이나 키예프 발레학교를 지원하겠다고 나섰을 때 발레학교 측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