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대 남성의 안티 페미니즘과 보수화를 일컫는 ‘이대남 담론’이 뜨겁다. 이대남이 정치권의 주요 공략 표심으로 대두되면서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해외 언론도 앞다퉈 이대남 현상을 다루면서 페미니즘이 한국에선 ‘더러운’ 단어가 됐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현재 한국에선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나 남녀 편 가르기가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도 통하지 않는다. 대신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순간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백래시(backlash·반발)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공연계에선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미니즘을 표방하거나 여성 서사를 다루는 작품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당장 올해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1~2월 선보이는 창작산실 연극 부문 6편 가운데 극단 Y의 ‘탈피’(1월 28일~2월 1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와 호랑이기운의 ‘콜타임’(2월 18~27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등 2편이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다. 2017년 창단 이후 페미니즘 이슈를 다뤄온 젊은 극단 Y는 이번 작품에서도 교수의 성추행 때문에 대학원을 그만두고 동물원에서 일하는 매니저와 나쁜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 탓에 탈피를 멈춘 뱀을 통해 상처 입은 자들의 연대를 말한다. 또 2017년 페미니스트 극작가들의 모임에서 출발한 호랑이기운의 ‘콜타임’은 20대 삼수생이자 조연출인 은호와 40대 여성 배우 범순의 모습을 통해 한국 연극사와 현재 페미니즘의 충돌을 코믹하게 그렸다.
3월에도 페미니즘이 바탕에 깔린 연극 두 편이 관객을 찾아온다. 지난해 초연 당시 호평을 받아 다시 무대에 오르는 극단 혜윰의 ‘휴식하는 무늬’(3월 2~6일 소극장 산울림)는 정신쇠약에 시달리는 여주인공을 통해 19세기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았다. 20세기 영미 페미니즘 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히는 샬롯 퍼킨스 길먼의 단편 ‘누런 벽지’를 원작으로 한다. 그리고 최근 영국에서 주목받는 여성 극작가 태티 헤네시의 1인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3월 15일~5월 1일 드림아트센터 4관)도 기대작이다. 국내 초연되는 이 작품은 십대 소녀 로리가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북극에 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자신을 페미니스트 극작가로 칭한 헤네시는 이 작품을 통해 극지 탐험이 남성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지구의 심각한 기후변화 문제를 담았다.
그동안 남성 캐릭터 중심의 서사가 많았던 뮤지컬 분야에서도 최근 여성들의 연대를 다루거나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작품의 수나 인기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번 3월에도여성들만 출연하는 두 작품이 나란히 개막한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생애를 다룬 ‘프리다’(3월 1일~5월 29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와 1892년 미국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리지’(3월 24일~6월 12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다. 실화를 소재로 한 두 작품 모두 사회적 편견과 억압을 벗어나려는 여성의 이야기다.
미투 운동으로 각성한 공연계 창작자와 관객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논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몸을 사리는 요즘 공연계가 거꾸로 가는 이유는 뭘까. 2018년 한국에서 미투(me too) 운동이 일어날 때 공연계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창작자들을 각성시킨 영향이 크다. 실제로 미투 운동 이후 위계, 폭력, 차별을 없애기 위한 자치규약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국내 예술계에서 공연계가 유일하다.
김소연 연극 평론가는 “지난 2016년 ‘#00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문학·미술·영화계에서 성폭력 고발이 이어질 때 연극계는 조용했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공동작업을 하는 연극계의 특수성 때문이었다”면서 “하지만 2018년 미투 운동이 시작되자 연극계에서 둑이 터지듯 터져나왔는데, 다른 장르와 비교해 유난히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많았다. 사회적 파장을 떠나 연극계의 내상이 컸지만 그만큼 연극계의 억압적 장치나 환경이 사라지면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다양한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이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8년부터 페미니즘 연극제를 개최하고 있는 나희경 페미씨어터 대표는 “페미니즘 기반 작품의 창작자들은 예전부터 활동했다. 미투 이후 주목을 받으면서 마치 페미니즘 기반 작품이 많아진 것처럼 오해한다”면서 “예전에 비해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은 확실히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창작자 못지않게 관객의 의식 변화도 공연계에서 페미니즘과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의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공연계 관객의 80% 가까이가 여성이라는 것과 관련이 크다. 김소연 평론가는 “미투 운동 당시 연극계의 성폭력 고발은 대부분 관객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서 이뤄졌다. 디시인사이드의 익명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공연계에 대한 애정이 큰 고관여 관객들에게 미투 사태를 낱낱이 지켜보도록 만들었다”면서 “당시 관객들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미투 운동지지 집회를 펼치는가 하면 성범죄자의 공연 보이콧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관객과 창작자의 연대가 이뤄진 셈이다. 이후 젠더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관객들은 여성 캐릭터가 보조적으로 등장하던 기존 스타일과 다른 작품을 보고 싶어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남성 배우 팬덤 의존도가 높던 뮤지컬계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적극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 늘어난 것이다. 이수진 공연 칼럼니스트는 “뮤지컬 관객의 90%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미투 운동을 계기로 젠더 문제에 눈을 떴다”면서 “뮤지컬계에서 여전히 남성 배우들의 인기가 높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여성 배우를 좋아하는 여성 팬층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서사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이제 공연계가 미투 운동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요즘 작품의 여성 캐릭터가 대체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고 있는데, 좀 더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페미니즘 영향으로 여성을 넘어 사회적 소수자에게도 관심
최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심각한 것과 달리 공연계에서 페미니즘을 내건 작품이 증가하는 것은 비주류라는 장르적 속성에 기인하는 것도 있다. 미디어나 대중문화 등에 비해 대중성이 적기 때문에 ‘이대남 현상’ 같은 백래시가 몰려오지 않는다. 대신 여성 서사만이 아니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이 늘어난 것도 특기할만하다. 사실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와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운동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정진새 극작가 겸 연출가는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연극계에서 거대 담론을 대신해 우리 자신의 문제를 미시적으로 들여보는 작품이 많아졌다. 복잡한 동시대 문제를 다루기엔 여성 서사가 잘 맞는다는 점에서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극단 고래를 이끄는 이해성 연출가는 “미투 운동이 터져나왔을 때 ‘정신적 혁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의 경우 의식의 프레임이 깨지는 사건이었다”면서 “미투 운동 담론이 더 확장되어야 하는데, 최근 페미니즘을 놓고 이분법으로 나누어져 혐오를 주고받는 상황에 큰 문제의식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 극단은 내년에 젠더 문제를 다루는 작품을 올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