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드러낸 서방의 1차 제재 패키지…“일단은 수위 조절”

입력 2022-02-23 07:28 수정 2022-02-23 08:08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서방 동맹의 1차 제재 패키지 윤곽이 드러났다. 대형 국책은행과 고위층에 대한 금융 제재, 천연가스 수송관 사업 ‘노르드스트림-2’ 중단 등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타격을 줄 만한 경제 제재가 망라됐다.

그러나 이번 제재는 ‘전면적 타격’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대상에서 빠진 금융기관이 아직 많고, 기존 제재의 재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미 고위당국자는 “우리가 가할 수 있는 고통의 날카로운 끝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서방 동맹이 러시아에 대한 제한적 제재를 발표하며 푸틴 대통령에게 긴장 완화를 위한 여지를 준 것으로 분석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분리주의 반군 장악 지역만을 우선 흔드는 ‘단계적 전술’을 편 것에 대한 대응 차원인 셈이다. 대규모 유혈사태를 낳을 수 있는 전면전을 피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수위 조절한 1차 제재

조 바이든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인 대외경제은행(VEB)과 방위산업 지원 특수은행인 프롬스비야즈방크(PSB) 및 42개 자회사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이들 은행은 서방과의 거래가 전면 차단되고, 해외 자산도 동결된다. 푸틴 대통령 측근과 그의 가족에 대한 제재도 포함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서방 금융권에서 러시아의 국채 발행 및 거래를 전면 중단시켰다. 미국이 러시아 국가 부채 거래 차단 조치를 취하면서 서방에서의 자금 조달을 차단한 것은 효과를 낼 것으로 분석됐다.

미 고위 당국자는 또 VEB를 ‘크렘린궁의 돼지저금통’이라 부르며 이번 조치가 푸틴 대통령을 겨냥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블룸버그통신은 “VEB는 이전에도 부분적 승인을 받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며 “방위 산업을 위해 설립된 PSB 역시 제재를 미리 대비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미국 제재 대상에 오른 고위층 명단에는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국장과 그의 아들 데니스가 포함돼 있다. 세르게이 키리옌코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과 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PSB 페트르 프라드코프 회장 등도 제재 대상이다.

이들은 모두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이지만, 역시 상당수가 기존 제재 대상에 포함됐었다. 미 재무부는 나발니 독살 시도 등에 연루됐다며 지난해 3월 보르트니코프 국장과 키리옌코 제1부실장 등 7명을 제재했었다.

영국도 ‘푸틴 은행’으로 불리는 방크 로시야, PSB 등 5개 러시아 은행에 대한 제재를 시행했다. 방크 로시야는 푸틴 대통령의 고향 친구인 유리 코발추크가 설립한 곳으로, 2014년 제재 때도 포함된 곳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방크 로시야는 이미 수년간 제재를 받아왔다. 상징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

영국은 러시아 천연가스 회사인 노바텍 대주주 겐나티 팀첸코, 푸틴 대통령의 유도 파트너 아르카디 로텐베르그의 형제(보리스)와 아들(이고르) 등 3명의 자산을 동결했다. 팀첸코와 로텐베르그 일가 역시 과거부터 제재 대상이었다.
전면전 막기 위해 단계적 대응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제재를 발표하며 “2014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러시아에 부과한 조치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새로운 제재 발표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공격 시작을 막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처럼 보였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서방이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해 단계적 제재 선택한 것으로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번 조치를 ‘1차 제재’(first tranche)라고 언급하며 “러시아가 추가 행위를 할수록 우리도 제재 수위를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 고위 당국자도 이날 “침공이 계속된다면 러시아 금융기관은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며 “VTB 같은 대형 은행을 추가 제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 엘리트와 그 가족들은 그들에 대한 추가 조치가 취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고위 당국자는 “재무장관은 러시아의 모든 금융 기관이 추가 제재 대상임을 결정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일일 외환거래 80% 이상이 미국 달러로 이뤄지며, 국제무역 절반이 달러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서방 동맹에는 제재 대상 기관 확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배제,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기술을 이용해 생산한 제품 수출 금지 조치 등의 카드가 남아 있다.

고위 당국자는 “푸틴 대통령이 긴장을 더 고조하면 금융제재와 수출규제를 동시에 펼칠 것”이라며 “이는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전면적 분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사태를 방지하고 싶다. 또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는 것을 막고 싶다”고 강조했다.

한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과 회담 직후 한 공동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됐다. 더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앞서 양 장관은 24일 만나 긴장 완화를 위한 조치를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블링컨 장관은 이날 라브로프 장관에게 회담 취소를 알리는 서한을 보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