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 체류하다가 전쟁 위험으로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지난 17일 한국으로 귀국한 선교사 김평원(61)씨는 22일 국민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모든 것을 다 놔두고 옷 몇 개만 챙겨서 몸만 빠져나왔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고 회상했다.
현지에서 비행기 스케줄이 줄줄이 취소되는 등 예측불허의 상황이 전개된 탓에 자신의 한국행 비행기도 취소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5일 러시아·우크라 국경지대에서 러시아군 일부가 철군했다고 주장하면서 위기 국면이 다소 진정돼 다행히 한국행 비행기 등이 정상운행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1991년부터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했다.
김씨는 이번 사태의 초기에는 전쟁 위기를 체감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전시 상태였고, 그 세월이 8년 가까이 흐르다 보니 김씨뿐 아니라 현지 거주자들 모두 전쟁 위협에 무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러시아 침공 경고가 계속 나오고, 각국 교민과 공관이 철수하면서 실제 상황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김씨는 “러시아가 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키고 첨단무기도 배치해 폭격이 이뤄지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겠구나 싶었다”며 “한국 대사관도 여행금지 4단계를 내리고 우크라이나에서 나가라고 독촉했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3일 0시부터 우크라이나 전역에 여행경보 4단계를 발령했다. 철수권고에 해당하는 4단계는 여행경보 중 가장 높은 것이다.
김씨는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6·25 전쟁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동북아에서 미국 등 서방국과 중국·러시아 등 공산권이 남한과 북한을 완충지로 놓고 대치하듯이 유럽에선 우크라이나가 서방국과 러시아의 완충지대”라며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처럼 우크라이나도 동서 분단이 이뤄질 수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또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의 현재 상황이 핵보유국으로 가고자 하는 북한 김정은 정권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체류하던 우리 교민 중 일부는 김씨처럼 한국에 왔지만, 대부분은 불가리아·루마니아·헝가리·체코·폴란드·오스트리아·터키·룩셈부르크 등 인근 나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김씨는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자신과 같이 삶의 터전이었던 우크라이나를 떠난 교민들이 거처 마련부터 경제활동까지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김씨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피란민과 뭐가 다르나 싶다”며 “현지에서 무역업도 했는데, 계약 취소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러면서 “국익이라는 명목으로 무고한 생명을 인질로 삼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다”며 “약소국으로서 우크라이나가 겪는 주권 훼손과 현재 우리 교민들이 처한 어려움을 국민들이 잘 헤아려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