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지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군 투입을 지시하면서 전운이 거의 극에 달했다. 서방은 러시아를 맹비난하며 즉시 제재에 착수했지만 군사충돌은 여전히 꺼리는 모습이다. 8년 전 크림반도 병합 때처럼 러시아가 해당 지역을 무혈 접수할 공산이 커졌다.
푸틴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가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지역 2곳에 군 투입을 명령하고 더욱 광범위한 군사작전 가능성을 내비쳤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세운 나라”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영 TV는 푸틴이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법령에 서명하는 모습을 중계했다. 법령에는 러시아 국방부가 ‘평화 유지 기능’을 명분으로 해당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DPR과 LPR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2014년 5월 주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선언한 ‘자칭 국가’다. 그해 3월 러시아가 대표 친러시아 지역인 우크라이나 동남부 크림반도(크림공화국)을 병합한 직후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부는 물론 러시아를 비롯한 어느 나라도 이들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마침내 두 지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면서 ‘침략’과 ‘파병’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분리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 러시아군 배치가 불법적 침공이지만 러시아는 해당국 요청에 따라 정당하게 이뤄진 파병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는 한 서방이 당장 군사행동에 나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NYT는 “러시아군이 분리주의 공화국 통제 지역에만 남아있을지, 그들(분리주의자)이 영토라 주장하는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려고 할지는 확실하지 않다”며 “따라서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러시아의 본격적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돈바스 지역 전개 상황은 크림반도 병합 때와 흡사하다. 당시 푸틴은 주민투표 결과를 명분으로 삼은 분리주의자들의 ‘간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합병 절차에 돌입했다. 크림공화국 독립국 지위 승인부터 합병조약 서명, 러시아 의회 비준, 푸틴의 최종서명까지 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서방 진영은 러시아가 국제법과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무시했다며 맹비난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유엔 안정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그(푸틴)는 그들(러시아군)을 평화유지군이라고 부르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뭔지 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명백한 공격에는 이유가 없다”며 “푸틴의 이런 행동은 추가 침공 구실을 만들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잉그리다 시모니테 리투아니아 총리 등도 러시아를 강한 어조로 규탄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바이든 대통령은 곧 소위 DPR과 LPR에 대한 신규 투자와 무역, 자금 조달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표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국제적 약속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과 관련한 추가 조치를 곧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창욱 기자,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