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국내 대표적 작가이자 스타연출가 조광화

입력 2022-02-21 10:10

“대본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어색한 작업이죠.”

국내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조광화(58)를 만났다. 중앙대학교 철학과 시절 영죽무대 연극반에서 활동하면서 필명을 ‘조광화’(曺廣華)로 바꿨다. 김동인의 <광화사>, <광염소나타> 등의 탐미주의 소설에 등장하는 강렬한 캐릭터들을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광화’ 이름 한자에는 일화가 있다. 꽃이 열정적으로 피어난다는 의미로 대학 때는 ‘광화’(狂花)로 썼다고 한다. 졸업 후 대학로에서 첫 인터뷰를 했는데 신문은 한자 표기를 할 때였다. ‘미칠 광’ 한자 표기가 어려워 넓은 광(廣)과 빛 날 화(華)를 쓰면서 ‘무리를 지어 세상을 넓게 빛내고 번성한다’는 뜻처럼 조광화는 한자 이름처럼 한국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스타연출가가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중학교 1∼2학년 시절이었다. 그는 같은 동네에 살던 작은 형의 중·고등학교 단짝 친구였다. 80년대 초 공터가 많은 주택가 골목에서 작은 형 이름을 대문 밖에서 검정 교복을 입고 부르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형’이었고 작가와 연출가가 된 뒤로도 조광화는 낮선 이름으로 들렸다. 모자를 즐겨 쓰던 그는 두툼한 안경만 쓰고 나왔다. 그가 살아온 방대한 연극과 뮤지컬의 삶을 인터뷰 한다는 게 어색했다. 광화 형도 그런 눈치였다. 40년 전 이야기를 꺼냈고 그의 기억은 선명했다. 가족 같은 형이었고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연극인의 길을 걸었고 친구는 외교관이 되었다. <남자 충동> 초연 때 공연을 보고서도 연극을 하는 그가 실감나지 않아 극장을 빠져 나왔다. 방대하게 달려온 작가 연출가의 삶을 듣고 싶었고 그는 노트북에 기록을 담아왔다. 녹음기를 켜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그의 몸도 움직였다.


| 희곡<장마>와 <종로고양이가>가 30주년이 됐는데 다시 20대로 돌아온 것 같아요.

― 올해 문화일보 하계신춘문예 <장마>가 당선된 30주년이기도 하고요. 희곡 <종로고양이>가 살아온 지 30주년이 됐지요.

“세월에 대한 복잡함이 많아요. 보통 50대에 그런 방황들을 한다 잖아요. 뭐 하고 살았나 싶어요.(웃음) 지금은 다시 20대로 온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90년대에 연극을 할 때는 대학로 다 말아 먹을 줄 알았죠. 그만큼 패기가 넘쳤으니까요.(웃음) 이제 나의 한계를 봤다고 그럴까, 나의 존재를 두고 방황할 때로 다시 온 것 같아요. 제 인생에 굉장히 방황하던 시절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게 다시 온 것 같아요. 이렇게 ‘30년 됐으니까 어떤 것 같아요?’ 라고 했을 때 답을 못해요. ‘뭐 한 거지 나는? 작품을 남길 만한 게 있긴 있는 건가?’라는 생각들이 들어요. 그냥 내 나름대로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하면서 방법을 찾고 달려온 것 같아요.”

―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 자유에서 조연출도 하셨더군요.

“90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 자유의 연출부로 들어갔어요. 처음에 연출부로 들어갔는데 그 당시에 김정옥 선생님이 ITI 회장이셔서 세계 연극을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참여도 해 보고 그랬는데 제가 원하는 연극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뭐 랄까 조연출 생활은 나하고는 너무 안 맞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해야지? 어디 공부할 때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학원이나 유학갈 여건이나 상황들이 안되었죠.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였는데 그 때 누가 ‘공연 예술 아카데미’라는 게 있다고 하기에 냉큼 했었죠”


― 조광화의 작품 세계를 다루는 글에서 중앙대학교 영죽무대 시절 연기를 했고 연기를 잘하는 후배를 보면서 연기를 접었다고 들었다. 이후에 연출로 전향을 했고 ‘연출 공부란 결국 텍스트와 싸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연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공연예술아카데미는 연기 전공으로 들어갔었어요.(웃음) 연출을 하려면 연기부터 체계적으로 한번 배워보자 하고 갔었는데 연기하고 연출 공부할 시간은 없었고 극작 수업이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듣게 됐는데 연출을 하려면 텍스트와 싸우는 일 이라고 깨닫고 극작을 한 거예요. 그 전에는 글을 쓴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지요. 저한테 글 재주가 있다고 생각도 안 할 때였어요. 대본을 쓴다는 개념으로 글을 쓴다고 그러면 지금도 어색하고 어려운 일인데. 당시에는 대본이라고 생각하면 연출이 그냥 밑그림 잡는 정도로만 생각을 했던 거죠. 혹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지도 모르고 연출은 텍스트 분석부터 해야 되니까 내가 쓰면서 텍스트에 대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희곡을 쓰기 시작한 거였어요.”

― 문화일보 하계 신춘 문예 당선작 <장마>는 자전적 이야기죠?

“하고 싶은 얘기였어요. 세상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살다 보니까 너무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그때는 ‘왜 나는 이럴까?, 우리 집은 왜 이럴까?’ 이거밖에 관심이 없었단 시절 이였지요. 제가 아는 세상은 그게 다였으니까 우리 집 얘기를 그냥 한 거죠. <장마>를 쓰고 처음에는 조선일보 신춘 문예도 냈어요. 그때 심사하시는 분이 오태석 선생님이었는데 이 작품이 약간 유진오일 풍이고 오 선생님하고 전혀 다른 스타일일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굳이 지원했던 이유가 ‘당선이 된다면 인정을 받는 거다’라고 생각해서 지원을 한 거였죠. 당시에는 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다 될 때였으니까 웬만하면 될 것 같더라고요(웃음). 자신감이 막 있었죠. 최종심에는 올라가고 안 됐는데 기다리기도 뭐 해서 마침 그때 문화일보 하계 신춘 문예가 생겼고 바로 작품을 냈는데 당선이 됐어요.”

―1997년도<남자충동> 이전은 작가로 작품을 생산적으로 발표하다가 이후부터는 작·연출을 하는 조광화 시대를 열게 되었지요.

“원래 연출을 하고 싶었어요(웃음). 원래 연출을 하려고 했으니까 작품을 쓸 때 내 희곡을 바라보는 무대 그림들이 있는데, 내 작품을 다른 연출들이 하는 걸 보고 뭔가 성에 안 찼고 작품이 무대에서 형상화 되어야 하는 작가로서 갈증이 확 왔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앞으로 내 작품은 내가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남자 충동>도 가족사의 이야기인데.

“‘집안 얘기를 들어내니까 좀 그렇다’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어차피 허구로 다 보니까 포장이 돼 있기도 하고요. 한번은 저희 부모님이 남자 충동 공연을 보러 오신 적은 있었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와서 보시고 올 때의 반응과 나갈 때 반응이 다르더라고요(웃음) 아버지는 신나서 오셨다가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 없으시고(웃음) 어머니는 공연 끝나고 내 손을 꼭 잡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이고 네가 내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그랬었구나. 그러시는데 사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가졌던 생각이 ‘이 세상에 재미없는데 왜 들 저렇게 살지’ 하고 생각을 하던 시기였어요. 학교나 집은 늘 지옥이었고 늘 폭력과 억압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중세 암흑시대를 배울 때 ‘아 저게 내가 지금 사는 세상하고 같구나’ 근데 왜 이렇게 살지 늘 우리 아버지 보면 싸우고 있고 우리 형제들도 늘 화가 나 있었죠.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보면 다 화가 나 있는 것 같았고 ‘왜 저러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려서부터 쌓여온 내면의 생각들이 작품으로 투영된 거죠.”

2017년도 뮤지컬 모래시계에서 배우 신성록

― 조광화의 작품 세계를 다룬 글을 읽으니 ‘중학교 때 수돗물만 먹으면서 버텼다’는 문장이 있더군요. 모범생인 형이 반듯하게 검정 교복을 입고 주말에 대문 밖에 서 있던 장면이 스쳤어요.

“도시락을 안 싸가서 굶었죠.(웃음)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시장을 새벽에 나가셨는데 밥을 한 솥 단지 해 놓고 반찬도 비슷하게 해 놓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도시락을 싸가야 하는데 그 도시락을 싸는 게 되게 싫었어요. 그래서 그냥 안 들고 갔어요.(웃음) 이상한 고집이죠. 배고프면 힘든데 중학교 때는 정말 점심시간 되기 전부터 배고프잖아요. 그 시절에는 가족 분위기도 영향을 주어서 인지 어려서부터 신화와 전설에 관련된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어요.”

― 어려서부터 신화와 전설에 관련된 문학 서적을 탐독한 것이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출구였던 것 같은데.

“제가 어렸을 때 관심 가졌던 게 신화 전설인데, 신화에 관련된 것을 깊게 생각하다 보니까 그 이야기가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자기들 모습을 이상화 하기 위해 ‘스토리텔링화 된 이야기구나’라고 생각 했어요. 희곡의 모티브들이 가족사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많은데 신화 전설 공부하면서 결론은 아 이게 ‘가부장’이구나 느꼈어요. 아버지 세대가 그런 것 같아요. 가부장적인 권위와 문화, 권리 이런 것들 속에서 살다가 갑자기 6.25가 터지고 70년대는 산업화되고 경제 개발이 되면서 숨 가쁘게 살아왔는데 이 틈에서 승리하는 몇 사람 외에는 살아가기가 벅차잖아요. 아버지도 갑자기 찌질해 지는 거예요. 옛날에는 농경사회다 전통 사회다 그러면 ‘자기의 역할’이라는 게 있는데 산업화되고 핵가족화 되고 경제 발전을 되면서 1등만 대우 받는 이런 시대에서는 가부장의 문화와 관습은 물려받았는데 실질적으로 도덕, 책임감 이런 거는 배울 틈이 없었잖아요. 희생하는 것도 배울 수가 없었고요. 어른이 되면 희생을 해야 되는데 희생도 배우지 못한 상태로 옛날 가족의 질서로 봤던 막 ‘오냐 오냐’ 하면서 대우 받던 거는 물려받았고 자식들한테는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거죠. 이 양반들이 그 시대에 대물림된 전통들이 폭력으로 나오는 것 같았어요.”

|<남자 충동>이후 괴물처럼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고 연출하면서 30대 초반에 90년대 부터 대표적인 작가이자 연출가가 된 조광화.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동네 골목이 아닌 대학로에서였다. <종로고양이>(1992)를 할 때였고 김광보 연출에 의해 극단 청우에서 공연되면서 이 작품은 조광화를 알리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출발하게 된다. <황구도>(1993) <천상시인의 노래>(귀천,1993), <아,李箱!>(1994),<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안보자 하여>(1994), <오필리어>(1995),<여자의 적들>(1995), <남자 충동>(1997), <미친 키스>(1998)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조광화는 30대 초반에 90년대 한국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가 된다. 조광화의 작품은 <남자 충동>이전과 이후의 세계로 구분된다. 이전의 작품 세계는 극작가로 무대를 바라봤고 이후부터 희곡과 뮤지컬 등 자신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그의 희곡과 무대는 기성세대와 차별화를 이루며 파격적인 무대를 연달아 선보이면서 조광화 시대가 시작된다.

―<종로고양이>는 극단 후배 누나의 다방 계단 밑에서 작품을 구상했다고 들었어요.

“극단 후배 누나가 당시 운영하던 다방 계단 밑에 짜투리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가 글 쓰는 공간이었어요. 변두리에서 맨날 살다가 심야의 종로를 처음 봤는데 정말 기묘하더라고요. 사람 사는 서울은 대 인구가 몰려 사는 곳인데 서울 한복판인데 밤 되니까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귀가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밤 되니까 고양이만 있더라고요. 말하자면 도시 공동화현상이죠.”

2021년도에 공연된 오페라 박하사탕의 한 장면

― 밤이 되면 거리의 고양이들 만 들 끊는 종로 파고다공원이 작품 공간의 배경이 되었군요.

“지금은 다시 종로가 다 부활했지만 그때는 점점 비어가는 분위기였어요. 남루하고 인생 떨거지 같은 사람들이 다 모여 있더라고요. 노인네들부터 몸 파는 여자들, 성매매 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죠. 윤여정의 영화<죽여주는 여자>에서 박카스 할머니처럼요. 늙거나 정신도 정상적이지 못한 그런 취약한 여자들이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 하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 이였어요. 가출한 애들, 게이들, 동성애자들도 많았고요. 그런 종로 거리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과 어떤 연민이 생긴 것 같아요. 성공을 향해 달리는 90년대 초 역동적인 서울도시 한복판에서 우리들의 안쓰러운 실상(實相)들을 작가로 바라보고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한국사회가 발전하는 것만 보여주고 살았잖아요. 군사독재 시절 경제개발주의 시대에 교육받으니까 발전, 발전, 발전만 외치던 그런 깃발들만 봤는데 ‘세상은 안 그렇구나, 거꾸로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죠. 인간이 언젠가는 스스로 사라져 버리고 이 고양이들만 지배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러한 삭막한 도시이미지를 그리면서 출발을 한 작품이에요.”

― 조광화는 종로고양이 발표 이후 우화형식의< 황구도> (1993)를 발표하고 이 작품은 창작뮤지컬로도 만들어진다. 이후 <아 李湘>(1994), <꽃뱀이 나더러 다리를 감아보자 하여)(1995), 오필리어<1995), <여자의 적들>(1996), <미친키스>(1998), 뮤지컬 락햄릿(1999), <철안붓다>(1999)을 연달아 발표를 한다.

“<아 李湘>(1994)은 의뢰를 받고 만든 작품이에요. 박계배(극단서전) 대표가 그때 ‘작품을 이상 얘기로 하자’ 그래서 하겠다 했었죠. 천재 이상을 좋아했었거든요. 이상도 예술가의 한 모습이잖아요. 예술가의 인생이 전 좋아요. 특히 이상이 좋았었던 거는 당시에 관심이 ‘어떤 사람들이 젊은이들이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불편한 열정이 있고 이상을 갖고 순수하게 행동하는 게 젊은인가? 하는 생각들이요. 작가 이상을 통해서 본 것은 ‘불안한 재능’이었어요, 이상이 살아가던 시대는 나라를 잃었잖아요. 그런 나라에서 가진 재주는 ‘글’이었고, 그 시대는 문학적 언어도 점점 말살 당할 거라고 생각하면 작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요? 역사에 남지 않을 언어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그 절망감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갖고 있는 뜨거움은 언어에 대한 열정이고, 그걸 풀어낼 방법은 언어적 객기 밖에 없는 거죠.”

― 청년들은 저항과 문학을 논리적으로 풀어내지 못할 때 객기(客氣)의 언어가 때로는 시대의 언어가 될 수 있고 이상과 같은 천재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지요.

“제가 대학 연극반 생활을 하면서 또래의 젊은이들을 봤을 때, 뭔가 뚜렷하고 멋있는 미래와 비전의 이상(理想)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였어요. 대부분 젊은이들은 내 안에 뭔가 끓고 있는데 받아주는 곳은 없고 보장도 없는 시대에서 금방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세상에 작은 흔적을 남기느라고 발악을 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상은 그 시대에 언어를 통해 ‘위장술’을 쓴 거라고 생각해요. 이상이 실제로 썼던 말이에요. 이상의 언어와 시들이 난해한 것을 저는 그렇게 본 거예요. 세상에 자기 자신이 ‘살아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한 객기처럼 이상한 짓을 막 해버리는 거죠. 그게 시적인 형식이나 언어로 공교롭게도 뛰어났던 것 같아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의 객기이자 치열한 몸부림 이었던 거죠.”

―가부장적 폭력을 다룬 <남자 충동>도 그렇고 <미친 키스>(1998)에는 강렬한 캐릭터가 존재하면서도 음악적인 리듬감이 있다. 한 평론가는 ‘미친키스’에는 ‘절제된 미학을 구현한 작품’ 이라고 평가하더군요.

“제 작품에 다 음악적 요소가 있거든요. 작품을 쓸 때 연극을 좋아했던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현장성인데, 배우들의 에너지에 압도 당하는 느낌이 좋았어요. 제가 탐미주의를 좋아했던 것도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고 약간 극단적으로 가잖아요. 그 캐릭터의 강렬함에 끌리거든요. ‘어떻게 사람이 저런 열정을 가질 수가 있지?’ 이 세상 재미없는 것 같은데 ‘저런 열정을 가질 수 있다고?’ 전 그게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강렬한 캐릭터의 존재감에서 인간의 뜨거움을 느낀 거죠. 이게 연극을 하는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얘기했지만 저는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 해요.”


― 국내 대표적인 작가가 이야기를 잘 만들지 못한다고 말 하면 겸손으로 들리는군요.

“무대에서 존재감 있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대본을 쓰려고 했던 거고요. 어떻게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 희곡은 거의 대사로 채워지잖아요. 근데 사실 ‘조광화의 작품이 영화 같아’라는 거는 그 이미지적 감성이 있다는 건데, 그 이미지적 감성이라는 게 결국은 한 인물이 주는 에너지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또 다른 인물이 있었을 때 일어나는 거죠. 그 인물이 주변 인물과 액션, 리액션을 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존재감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인물의 생명은 리듬감, 심장 박동 소리하고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리듬감 그 사이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 않는 감각적인 게 있는 거거든요. 그러다 보니까는 미처 말 못하는 것을 노래로 표현하려고 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연출을 할 때도 장면과 장면의 연결과 장면 안에서의 리듬감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을 하죠. 첫 연출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 뮤지컬이 이야기하기 오히려 편해요.

조광화는 6개월 정도 사찰(寺刹)에서 머물면서 기존 작품 세계와 다른 불교이야기를 다룬 <철안 붓다>(1999)를 발표하고 2002년도까지 극단 ‘유시어터’ 상임연출을 맡는다. 상임연출 된 후 첫 작품으로 철안붓다를 집필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뮤지컬을 쓰고 연출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2003), <달고나>(2004), <천사들의 발톱>(2007),<소리도둑>(2007),<내 마음의 풍금>(2008),< 남한산성>(2009), <서편제>(2010), <모래시계>(201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21)와 오페라< 박하사탕>(2019) 등 작품별로 쓰고 때로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천사들의 발톱>으로 제1회 뮤지컬어워즈 연출상을 수상한다. < 내 마음의 풍금>으로 제14회 한국뮤지컬 대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하며 연극으로 출발한 조광화는 ‘한국연극’에서는 드물게 연극과 한국창작뮤지컬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연출가가 된다. 30여 편의 연극과 오페라, 창작 뮤지컬을 쓰고 연출했으며 타인의 작가 작품 15편을 연출해 5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연출했다. <남자충동>으로 제34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 제34회 백상예술대상 ‘대상’과 희곡상을 <철안 붓다>로 제1회 김상열 연극상등 수많은 연극, 뮤지컬계 상을 받으며 조광화는 한국연극과 뮤지컬계에서는 독보적으로 세대 교체를 이룬 연출가이자 작가가 된다.

― 2000년대 들어서는 연극 보다는 창작뮤지컬을 쓰고 연출을 했다.

“뮤지컬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때 당시 연극 연출들에게 많은 의뢰가 들어왔어요. <천사들의 발톱> 같은 경우는 악어 조행덕 대표가 뮤지컬을 같이 개발하자고 의뢰를 한 작품이죠.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고, 쓰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쓰게 되었어요. <내 마음의 풍금>을 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남자 충동>을 환 퍼포먼스에서 먼저 공연을 했잖아요. 그때 김종헌 피디가 <남자 충동>대본을 여러 곳에 보여줬어요. 다들 제작에 자신 없어 했는데 김종헌 피디가 설득해서 환 퍼포먼스에서 제작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제 작품을 너무 좋아해 줬어요. 그 덕에 <남자 충동>과 뮤지컬<달고나>를 하게 됐어요. 그 이후에 김 피디가 독립해 나오고 아이템들을 찾을 때 작품을 가져왔는데 저는 연출로 캐스팅이 된 거죠. <내 마음의 풍금>도 <소리 도둑>도 둘 다 서정적인 작품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조광화가 맨날 센 것만 하는 줄 알았는데 서정적인 걸 해서 특이하다고 했는데 그게 다 우리 아침이(딸) 때문에 한 거죠.(웃음)”

2015년 뮤지컬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배우 조승우와 전미도

― 그는 제5회 더뮤지컬어워즈에서 국악과 양악을 융합한 <서편제>(2010)로 극본상 수상자였다. 그러나 작가 양심상 부끄러운 극본 상을 수상할 수 없다며 거부하게 된다. 시상식 후 한 기자가 쓴 ‘뮤지컬에는 왜 김수현 작가가 없을까’라는 기사 때문 이였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시상식에서 조광화는 국내 창작뮤지컬 제작 환경의 어려움을 6분 넘게 토로했고 그대로 전파를 탔다.

“(웃음) 수상 거부는 최민우 기자 기사를 보고 거부하게 되었지요. 기자 칼럼에서 ‘더뮤지컬어워즈 희곡상 심사 과정에서 최악(最惡)이 아닌 차악(次惡)의 작품한데 희곡상을 준다’는데 어떻게 받아요. ‘극본상은 뽑을 만한 게 없었는데 억지로 준 거다’라는 뉘앙스였죠. 그래서 못 받겠다고 했어요. 시상식에서는 제가 창작 뮤지컬의 어려움에 대해서 토로를 했어요. 사실 시상식에서는 다양한 말들을 하잖아요. 미국아카데미상만 해도 정치적인 발언도 하고 기후 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인데 전 그때 답답했죠. 일단 제작자가 죽어버렸으니까 자살을 해버렸으니까 답답했던 것들이 있었거든요. 어른들이 열심히 하는 후배들을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이상한 말들을 하고 다녀서 그 섭섭함 들을 갖고 있다가 에둘러서 표현한 거였어요. 당시 기자는 ‘자기가 축제 판을 만들어 줬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이상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분위기 썰렁하게 했냐’라고 불만이었겠죠. 마침 그때 상패와 상금 수령을 안 한 상태여서 안 받겠다고 한 거고 수상 목록에서도 지워 달라고 했고 결국 지웠죠.(웃음)”

― 국립 극단 창단 70주년(2020) 공연으로 ‘파우스트 엔딩’을 재 창작하고 연출을 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조광화는 ‘신에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을 지고 지옥으로 간다’고 해석했고 평가가 좋았다.

“그 작품도 <철안붓다>하고 같은 방향의 주제로 인간이 좀 겸손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 거죠. 말하자면 한 인간이 세상을 다 안 것 같고, 속세까지 승리하기를 바란 건데 그런 행동들이 상처를 줄 수 있잖아요. 인간이 훌륭한 것 같아도 상처를 남기면서 살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인격도 주변에서 상처 받는 사람이 있고 때로는 그 상처가 부각되기도 하죠. ‘그런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면, ‘오만하지 않는 것’ 내가 옳았다고 해서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에서 내가 의도하든 안 하든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완전한 정의는 없는 세상이니까. <철안붓다>하고도 맞닿아 있다는 얘기죠. ‘우리 인간 안에서 미륵불이 나올 거야’ 라는 것도 오만한 생각인 거죠.”

― 희곡을 쓸 때 조광화 작가의 특별한 원칙은.

“수업할 때 늘 하는 이야기인데, 드라마는 한 인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것 이죠. 인물과 인물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과 인물이 부딪히면서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 상대방과 만나게 되잖아요. 결국 관객이 보는 거는 그 인물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불안정한 것들이죠. 관객은 그걸 어떻게 이겨내고 또는 실패 하나를 보는 거죠. 그걸 잘 그려야 하는 것 같아요.”

― 작품을 연출을 할 때 도 희곡을 쓰는 것처럼 무대의 이미지들을 구성해 놓을 것 같군요.

“여러 역할의 연출들이 있는데 프로듀서인 연출도 있고 그리고 미장센의 연출도 있고요. 그런데 결국은 연극은 드라마적인 연출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기본으로 놓고서 다른 걸 해야 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미장센의 연출에 치우치면 미술 전시회 같은 연출을 하게 되고 선동적인 깃발에 꽂혀 연출을 하게 되면 프로파간다적인 정치극이 되버리는 거고요. 드라마는 누구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는 거잖아요. 결국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언어로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 얘기해야 하고 그걸 부각하려다 보니까 작가의 스타일도 생기는 거고요. 거기에 어울리는 옷을 입히고 무대에 그림을 만드는 거죠. 지금 이 작품은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어 그런데 새롭다는 건 이제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60∼70년대 실험극들은 온갖 것들을 시도해 봤잖아요. 더 이상 새로운 게 있나? 예를 들면 가장 흔하게 얘기하는 비선형드라마, 선형드라마 하는데 비선형도 할 만큼 다 했고 영상을 쓰는 게 새로운 것도 아니잖아요. 로봇을 무대에서 쓴다는 것도 기술적인 도약은 있을지 몰라도 그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닌 거죠. 늘 새로운 건 역시 인간을 다루는 드라마인 것 같아요.”

2017년 남자충동 공연장면에서 배우 박해수

― ‘늘 새로운 것은 인간이다’ 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똑같은 게 늘 새롭죠. 왜 그러냐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잖아요. 인간의 이야기를 애써서 보려고 하는 힘이 드라마를 보는 힘이고 인간을 보는 힘인데 그것을 말하기 위해 판타지로 가는 세상에서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지금 이 세상에서는 뭔가 위험한 발언이 안 되기 때문에 저도 작가로 판타지라는 전략을 구성하고 설정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밖에 없고 그 언어로 세상에 말할 수밖에 없는 거죠. <파우스트 엔딩>도 판타지 설정이고 최대한 드라마로 가려고 했는데 결국 본질에는 못 간 것 같아요. ‘오징어 게임’이나 ‘기생충’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 부조리를 전형적 계급으로 나눠서 특수한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우화처럼 보여주는 건데 굉장히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노매드랜드>나 <쓰리 빌보드>는 특수한 상황에서 인간들의 섬세한 순간들을 담아내잖아요. 물론 예전에 봤던 영화 설정에 갇혀있는 어떠한 인간일지 모르지만 그 질감은 다르거든요. 하지만 옛날 가족 구조 안에서 <남자 충동>처럼 꽉 짜여 있는 가부장적인 틀이 확고하지만 그 안에서도 살아가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틀이 있고 관계 속에서 갈등하고 무너져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그 무너지고 불안전한 가운데서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인간성은 그 안에 있단 말이죠. 지금 시대에 인간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거는 영화에 다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런 인간과 인물들을 그려내고 싶은 거죠.”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저녁 공연을 봐야 한다며 일어섰고 공연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둘은 거리에 허름한 중국집으로 들어갔고 그의 기억을 소환하는 40년 전 교회연극 시절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고 쏟아내는 말들을 듣고 있었다. 어려서는 희곡 작가와 연출을 하게 될 줄 몰랐다고 한 그였지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철학적인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본 것 같았고 토해내고 싶은 말들이 한국 연극의 대표적인 희곡과 작품으로 용해되면서 조광화의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작품 세계가 형성된 것 같았다. 그의 고집스러운 ‘정직함’은 때로는 강렬한 극중 인물의 캐릭터와 서사로 연극과 창작 뮤지컬로 쏟아냈고, 그를 국내 대표적인 작가이자 연출가로 부른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