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천재의 불행한 올림픽…銀 트루소바 “피겨 그만 할래”

입력 2022-02-18 13:59 수정 2022-02-18 14:26
“나만 없는 금메달, 지긋지긋한 스케이팅, 그만하고 싶어요.”

17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종료 후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트루소바(17)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 그는 이날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넘어지지 않고 착지한 최초의 여자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됐으나, 러시아의 안나 셰르바코바(17)에게 총점에서 밀리며 은메달을 걸었다. 그는 취재진에게 "나는 다시는 스케이트를 타지 않을 것"이라며 실망감을 여지없이 내비쳤다. 연합뉴스

모차르트 앞의 살리에리가 그랬을까. 꿈의 무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최고의 선수가 “더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불과 2004년생, 열일곱 어린 나이에 정점에 도달할 것을 요구받는, 그래서 도핑 스캔들로 얼룩진 냉혹한 피겨스케이팅 판을 반추하게 한다.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알렉산드라 트루소바는 17일 중국 베이징 서우두 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77.13점으로 1위에 올랐다. 이틀 전 쇼트프로그램에서 트리플 악셀 점프 실수로 아쉬운 성적을 남겼지만 프리에선 달랐다.

1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 출전한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알렉산드라 트루소바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트루소바는 총점 251.73점을 기록해 은메달을 차지했다. 연합뉴스

프로그램에 무려 5차례나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넣어 기본 배점에서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여자 선수 중 최초로 공식 대회에서 쿼드러플 4종(플립, 러츠, 살코, 토룹)을 성공시키며 4회전 시대를 연 ‘점프 머신’ 트루소바였기에 가능한 구성이었다. 실제 착지 과정에서 미세한 실수는 있었지만 쿼드러플 살코와 플립, 러츠, 쿼드러플 토룹과 트리플 토룹 연결 점프 등 4회전 점프 요소를 무리 없이 성공시켰다.

하지만 쇼트 점수를 합산한 결과 251.73점으로 같은 러시아의 안나 셰르바코바(총점 255.95)에 밀려 은메달에 그쳤다. 쇼트에서 발리예바와 함께 80점대 고득점을 기록한 셰르바코바는 쿼드러플 점프를 2회만 뛰는 대신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전을 선택했고 전략은 적중했다. 점프 외에 스텝과 스핀 등 완성도에서 트루소바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대로 가산점과 예술점수에서 앞섰다. 도핑 논란 속에 연거푸 실수를 범하며 프리스케이팅을 망친 발리예바가 4위로 내려앉았지만 포디움(시상대) 가장 높은 곳은 동갑내기 팀 동료 셰르바코바 차지였다.

1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이 끝난 뒤 열린 플라워세리머니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러시앙올림픽위원회(ROC)의 안나 셰르바코바가 ROC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신의 최종 순위를 확인한 트루소바는 오열했다. 예테리 투트베리제 코치를 밀쳐내고 “다신 올림픽 따위 도전 않겠다”고 절규했다. 투트베리제 코치가 다독였지만 아랑곳 않고 “(경쟁자들) 다 금메달이 있는데 나만 없다. 스케이팅이 싫고 이 스포츠(피겨스케이팅)가 싫다. 다신 스케이트를 안 탈거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이후 취재진을 향해서도 “결과에 만족할 수 없다. 난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트루소바는 감정을 추스렀는지 플라워 세리머니와 공식 기자회견에는 참석했다. 왜 울었느냐는 질문에 “그냥. 울고 싶어서 울었다. 엄마와 강아지 없이 3주를 보냈다”며 평범한 그 나이 소녀 같은 대답을 늘어놨다. 하지만 뒤이어 “3년 동안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항상 우승을 위해 쿼드러플 점프를 추가한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어 “내가 그것(완벽한 점프와 연기)에 도달하면 이기겠지만 아직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속상했다”고 덧붙였다.

1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이 끝난 뒤 열린 플라워세리머니에서 메달 수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은메달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금메달 안나 셰르바코바, 동메달 사카모토 가오리. 연합뉴스

통상 여자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전성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다. 그나마 체중·체형 등 신체 변화를 잘 넘기고 기량을 유지했을 때 이야기지 10대 중후반에 짧게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유망주가 끝없이 쏟아지는데다 점프와 기술 위주로 세계 피겨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러시아 선수들의 선수생명은 상대적으로 더 짧은 감이 있다.

발리예바 이전 러시아 피겨는 ‘3A’라 불리는 천재 세 명이 주도했다. 한 살 위 2003년생 알료나 코스토르나야와 트루소바, 셰르바코바가 차세대 피겨여왕 경쟁 최전선에 있었다. 셋 다 투트베리제 사단 소속으로 트루소바가 주니어 시절 점프 완성도를 무기로 앞서나갔고 엎치락뒤치락 하며 경쟁을 펼쳤다.

'도핑 파문'을 일으킨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의 카밀라 발리예바가 1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 출전해 점프한 뒤 착지에 실패하고 있다. 발리예바는 이날 쇼트프로그램(82.16점)과 프리스케이팅(141.93점) 합계 224.09점으로 4위에 머물렀다. 당초 발리예바가 3위 안에 들어 메달을 획득할 경우 플라워 세리머니가 취소될 예정이었지만 메달권 밖으로 밀리면서 경기 직후 링크에서 열리는 플라워 세리머니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연합뉴스

코스토르나야가 체형 변화 및 코로나 감염 휴유증으로 올림픽 시즌 부진했고, 그 틈에 신성 발리예바가 트루소바에 버금가는 점프와 한 수 위 유연성을 갖춘 ‘완전체’로 떠오르며 새로운 ‘빅3’를 형성했다. 올림픽에선 도핑 스캔들로 발리예바가 주춤했지만 3년 연속 내셔널 챔피언으로 꾸준한 기량을 유지한 셰르바코바가 트루소바를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올림픽은 타이밍’이라는 속설이 또 한 번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점프 등 기술 완성도에 집중해 어린 선수들을 양성해내는 러시아 투트베리제 사단의 ‘공장형’ 트렌드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올림픽 나이 제한을 17세로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ISU(국제빙상연맹)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는 이유다. 현 채점방식에서는 점프 요소에 워낙 많은 배점이 몰려있어 어린 선수들이 부상 위험에 노출되고 선수 생명을 길게 가져가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점프 성공 여부보다는 예술성 등 복합적 요소를 안배한 배점으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